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02
원래 연도나 날짜를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닌데 그날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에 기억하기 편하다. 동아리 후배가 내게 무언가를 부탁한 후 답례로 차를 대접한 날이었다(그 부탁받은 일을 나는 그렇게 잘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미안하다). 후배는 대학로와 성균관대 사이, 느린 달팽이의 사랑이라는 찻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홍차를 마셔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서 마신 홍차는 태어나서 그때까지 마신 모든 홍차 중 처음으로 ‘정말 맛있다’고 느낀 홍차였다. 영국의 홍차 브랜드 포트넘 앤 메이슨의 퀸 앤이라는 제품으로 기억한다.
포트넘 앤 메이슨이 그만큼 좋은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뜨거운 물을 채웠다가 비워서 예열한 티팟에, 100℃에 최대한 가까운 물로 3~5분간 우려낸 후, 쓴맛과 떫은맛이 불필요하게 우러나지 않도록 찻잎을 걸러내고 다른 티팟에 담은 홍차. 이 가게에 오기 전에는 그렇게 제대로 우려낸 홍차를 마실 기회가 없었다. 다른 카페에서 홍차를 마실 때는 항상 티팟에 찻잎이, 또는 머그잔에 티백이 계속 들어 있어서 금세 쓰고 떫어졌다. 우유를 타서 마시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우유를 함께 주는 카페는 드물고, 모든 홍차에 우유가 어울리지도 않는다.
홍차가 원래는 쓰고 떫은 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그날 당장 나는 홍차에 푹 빠졌다. 홍차에 대한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홍차에 대해 검색했다. 티팟을 장만하고 찻잎을 이것저것 사들였다. 한동안은 하루 세 번씩, 말 그대로 밥 먹듯 홍차를 마셨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1년 365일 중 350일 정도는 홍차를 마시는 것 같다. 취미를 넘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느린 달팽이의 사랑은 내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카페인 것이다.
나를 홍차의 세계로 이끌어서 아직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만든 가게답게, 느린 달팽이의 사랑은 속이 꽉 찬 홍차 전문점이었다. 포트넘 앤 메이슨, 위타드, 해로즈 등 영국의 유명한 홍차 브랜드가 메뉴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는 마시기 힘든 차도 많았다. 작은 유리병에 홍차 잎을 조금씩 담은 시향 키트도 있어서 주문할 때 향을 맡아보고 차를 고를 수 있었다. 찻잎을 따로 판매하기도 했다.
가게의 분위기는 낭만과 소박함이 공존했다. 벽에 거울과 커튼을 달아서 로맨틱하게 장식하는 동시에 내부가 실제보다 넓어 보이도록 하고, 그 거울을 마주보는 작은 2인석들을 만들어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다양한 티푸드가 한 번에 나오는 애프터눈 티 세트도 구색을 갖춘 동시에 실용적이었다. 샌드위치와 스콘과 디저트를 예쁜 2단 접시에 담았다는 점에서는 그럴싸했지만, 그 틈새에 끼어 있는 치즈케이크와 양갱을 보고 ‘그냥 평소 이 가게에 있는 음식을 대부분 꺼내다가 담았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식사 대신 먹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고 맛도 있었다. 특히 크로와상으로 만든 샌드위치는 아직까지도 가끔 생각이 난다.
가게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공용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만화책 《홍차 왕자》가 꽂혀 있었다. 내가 이 가게를 발견하기 오래 전에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아이들에게 홍차를 소개한 만화책이었다. 티팟을 예열한 후 홍차를 우려야 티팟 안에서 찻물이 대류해서 차가 고르게 우러난다는 사실도 이 만화책에서 처음 배웠다. 실제로 그렇게 우린 홍차를 마셔 볼 기회가 이 가게에 오기 전까지는 없었을 뿐.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단편적으로나마 처음으로 홍차를 가르쳐 준 《홍차 왕자》가, 이후 나를 실제로 홍차에 입문시킨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 꽂혀 있었다는 우연이 재미있다.
2010년 봄, 느린 달팽이의 사랑 성대점이 곧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흑석동 중앙대 앞에 본점이 있고 성대점은 분점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성대점밖에 가 본 적이 없다. 본점도 같은 해 가을에 폐업한 모양이다. 성대점에 마지막으로 찾아간 날, 아직 시간이 일러 손님이 나 하나뿐이던 가게에서 나는 차 두 종류를 천천히 마시며 앉아 있다가 왔다. 평소 그곳에서 보내던 시간처럼 조용하고 편안한 작별이었다.
이 글을 다듬으면서 포트넘 앤 메이슨의 퀸 앤을 다시 마셨다. 더 이상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서 마실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내 찻잎을 내 티팟에 직접 우려서. 내가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 드나든 시간은 2년에 채 미치지 못했다. 대신 그곳에서 나는 홍차를 사랑하게 되었고, 13년째 그 사랑을 이어 오고 있다.
표지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lgjiyoon/60053028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