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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커피와 책, 티테라스와 카페 위

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05

by 이정미

홍대 앞 티테라스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기에 좋은 홍차 전문점이었다. 북카페라고 할 만큼 책이 많지는 않았어도, 단순히 구색 갖추기로 책을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알찬 책이 여러 권 있었다. 홍차 메뉴도 마찬가지로 알찼다. 당시 공항 면세점을 제외하고는 해외직구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포숑의 홍차 몇 가지를 갖춰 놨다(지금은 포숑이 한국에 진출했기 때문에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공식 매장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상큼한 살구, 오렌지, 꽃 향이 나는 프랑스의 저녁이라는 홍차를 아주 좋아했다. 예쁜 노리다케 찻잔들도 향기로운 차에 잘 어울렸다.


티팟은 찻잔과 달리 노리다케 제품은 아니었지만 용량이 500ml 정도로 꽤 컸다. 그 밑에 작은 촛불을 켜서 차가 식지 않도록 하는 티 워머까지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따뜻한 차를 물배가 부르도록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홍차에 아주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홍차는 오랫동안 우리면 지나치게 쓰고 떫어지는데, 거기다 촛불로 달이기까지 하니 자칫하면 홍차가 아니라 탕약을 마시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티테라스는 여러 방법으로 그 위험을 최소화했다. 우선 찻잎에 비해 물을 넉넉히 넣었다. 그리고 티팟 속에 찻잎을 가두어 두는 형태가 아니라 찻잔에 얹어서 쓰는 형태의 거름망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차를 따를 때 찻잎도 어느 정도 같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티팟 속의 홍차가 지나치게 진해지지 않는다. 홍차가 적당히 진해지고 나면 설탕을 넣어서 마실 수도 있고, 무료로 주는 우유를 넣어서 마실 수도 있었다. 특히 거름망과 우유라는 방법은 몇 년 후 런던의 유서 깊은 호텔들을 돌며 애프터눈 티 투어를 할 때도 봤다.

티테라스 2.JPG 예쁜 노리다케 찻잔과 그 위에 얹어서 쓰는 스트레이너(거름망), 커다란 티팟과 그 밑의 티 워머.

차에 곁들일 티푸드로는 케이크, 간단한 브런치, 그리고 스콘이 있었다. 티테라스의 스콘은 약간 쿠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겉이 바삭바삭했다. 딸기잼과 휘핑크림이 함께 나왔다. 스콘에는 원래 클로티드 크림이 정석이지만, 티테라스의 쿠키 같은 스콘에는 클로티드 크림보다 더 달고 부드러운 휘핑크림도 잘 어울렸다.


티테라스의 외부와 내부는 모두 목재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도 나무였는데, 의자에는 방석이 깔려 있어서 오랫동안 앉아 책을 읽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인테리어가 단순한 대신 선반 위에 장식용 티팟과 수많은 곰 인형을 올려놓아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빈티지풍의 곰 인형은 모두 사람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동물 인형이 사람 옷을 입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친구와 함께 갔을 때 이런 농담을 했다. “사람은 다 벗고 다니면 변태 같잖아. 반대로 동물은 옷을 다 입고 있으면 변태 같아.”


어느 날 홍대 앞을 걷다가 보니 티테라스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와 있었다. 휘핑크림이 잘 어울리던 바삭바삭한 스콘은 오직 그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립다. 포숑의 프랑스의 저녁, 노리다케 찻잔은 그곳에만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로 티테라스를 대표하는 추억이다. 내가 농담거리로 삼았던 곰 인형들도 새로운 주인을 만났을지 궁금하다.

티테라스 1.JPG 딸기잼과 휘핑크림이 함께 나오던 스콘, 진해진 홍차에 넣어서 마시던 우유, 이대 앞 트리니티와 똑같은 설탕 결정.

비슷한 시기, 비슷한 동네에서 카페 위라는 가게에도 자주 다녔다. 서로 걸어서 1~2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티테라스와 어떤 면에서는 상반되고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곳이었다. 상반되는 점은 카페 위에서는 커피를 주로 판다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원두를 직접 로스팅했기 때문에 가게 한구석에는 항상 커다란 로스팅 기계와 원두 통들이 놓여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홍차를 가장 좋아하지만, 카페 위의 드립커피도 참 맛있었기 때문에 자주 마시러 갔다.


테이블과 의자가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서늘한 느낌을 준다는 점도 티테라스와 상반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내부를 소품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했다는 점은 티테라스와 닮았다. 프랑스어 이름인 카페 위(oui)에 어울리게 파리의 풍경 사진들도 벽에 매달아 놓았다.

카페위 1.JPG 서늘한 금속 테이블 위의 맛있는 드립커피와 카페에서 직접 만든 발로나 쇼콜라 케이크. 책을 읽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북카페는 아니지만 책을 잘 갖춰 놓았고 책을 읽기에 좋은 곳이라는 점도 티테라스와 비슷했다. 재미있는 점은 다른 카페들과는 달리 소설이나 에세이보다는 사회 문제와 관련된 교양서가 많았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카페 분위기에 어울리는 책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손님이 뜸한 평일 낮에 찾아가서 한참 책을 읽거나 대학원 과제를 하다가 올 때가 많았다. 어쩌다 일찍 일어나는 날은 사장님이 “벌써 가세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메뉴는 커피, 그 외의 음료, 카페에서 직접 만든 디저트 몇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가 아닌 음료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캔디 소다다. 유리잔에 과일 맛 알사탕인 참스캔디 여러 개를 넣고 그 위에 레몬 맛 소다를 부은 후 레몬 슬라이스와 블루베리 시럽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블루베리 물이 든 연보라색 투명한 소다에서 과일사탕의 새콤달콤한 맛이 났다. 사탕을 떠서 입에 넣을 수 있도록 긴 스푼도 함께 줬다.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음료다.

카페위 2.JPG 이름 그대로 탄산음료에 사탕을 넣은 캔디소다.

카페 위에서는 원래 음료를 테이크아웃하면 절반 가까이 할인해 주고, 가게에 앉아서 마시면 제 값을 다 받는 대신 깔끔한 도자기 잔이나 유리잔에 음료를 담아줬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갔더니 정책이 바뀌어 있었다. 가게에 앉아서 음료를 마셔도 테이크아웃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가격에 마실 수 있지만, 모든 음료를 테이크아웃용 종이컵 또는 플라스틱 컵에 담아주는 것이었다. 박리다매 전략으로 바꾼 듯했다.


드나드는 손님이 확실히 많아져서 가게는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평일 낮에 가도 오랫동안 책을 읽으며 앉아 있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이는 곳이 되고 말았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마시며 눌러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많아서 분위기도 예전보다 시끌시끌해졌다. 더 이상 나와는 맞지 않는 가게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래도 새로운 전략이 성공해서 장사가 잘 되고 오래 가기를 바랐는데, 어느 날 그 앞을 지나가면서 보니 폐업한 상태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장님은 일산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카페를 연 듯하다. 사진에서 보이는 빨간 색 커다란 로스팅 기계와 참스캔디 통이 낯익고 반갑다. 캔디소다는 메뉴에서 찾을 수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언젠가 일산에 갈 일이 생기면 들르고 싶다. 이번 카페는 더 오랫동안 한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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