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03
2008년 홍차에 입문하고 홍차 전문점을 하나씩 탐방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의 홍차 브랜드인 니나스 파리가 직접 운영하는 티룸이 서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는 한 그 당시 외국의 홍차 브랜드가 한국에서 직접 운영하던 매장은 니나스가 유일했다.
니나스는 2000년대 한국의 작디작은 홍차 시장에서 꽤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모양이다. 홍차 인구가 많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다음 순서는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이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니나스가 정확히 언제 한국에 진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04년 초 명동에 세련되게 꾸민 1호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홍대에 2호점도 냈다. 남산점은 맨 마지막에 문을 열었는데 명동점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생긴 것인지, 아니면 명동점이 임대료가 더 싼 곳으로 이전해서 남산점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니나스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남산점만이 남아 있었다.
니나스 남산점은 리라초등학교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언덕길에 자리를 잡았다. 이 두 곳 중 하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일부러 찾아가려고 해야 겨우 갈 수 있는 위치였다. 택시 또는 마을버스를 타고 멀리 돌아서 가거나, 걸어서 길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심지어 그 계단조차도 웬 철물점 옆의 좁은 골목길에 숨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니나스의 인터넷 쇼핑몰을 겸한 공식 한국어 홈페이지에서는 남산점에 오는 여러 경로를 재치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세월아 네월아 운행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옵니다.’ ‘긴 계단을 친구와 가위바위보를 하며 올라옵니다. 혼자라면 그냥 멋있게 올라옵니다.’
나는 주로 혼자서, 특별히 멋있지는 않게 계단을 올라 니나스에 갔다. 대학교 수업이 끝난 늦은 오후에는 초등학교와 애니메이션센터 모두 인적이 드물어서 남산 언덕길은 항상 조용했다. 그 가운데에서 마찬가지로 조용한 니나스가 나를 담담히 환영했다. 단순하고 깔끔하게 꾸민 가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속에 진열한, 니나스를 대표하는 빨간 홍차 캔이 보기 좋았다. 아담한 곳이었지만 손님이 꽉 찬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중년의 남자 점장님 외에 다른 사람이 일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항상 한산한 찻집이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갔을 때도 절반 정도 비어 있었다.
니나스 남산점에서는 항상 CD 한 장을 무한반복으로 틀어놓았다(내 기억이 맞다면 크리스마스 이브에만 예외였다). 시중에 나와 있던 컴필레이션 앨범인지, 점장님이 직접 선곡해서 구운 CD인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처럼 스트리밍이 흔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CD 단 한 장으로 버티는 카페는 처음이었다. 니나스에 갈 때마다 끝없이 반복되는 열두 곡 남짓한 음악 중에서 내가 아는 곡은 둘이었다. 하나는 스티브 바라캇의 The Whistler’s Song. 다른 하나는 그 CD에서 유일한 보컬곡이었던 스티비 B의 Because I Love You. 후자는 사실 꽤 좋아했기 때문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다가도 그 곡이 나올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들었다. 지금도 니나스를 떠올리면 그 곡부터 함께 떠오른다.
니나스의 티룸은 그렇게 간신히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홍차 맛만은 남부러울 데 없었다. 프랑스는 영국만큼 홍차를 많이 마시는 나라가 아님에도 수많은 홍차 브랜드가 있는데, 프랑스 홍차의 특징은 향수의 나라답게 화려하고 섬세한 향을 입힌 차가 많다는 것이다. 서양 홍차 문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이 향을 첨가하지 않은 기본적인 홍차에 더 주력하고, 가향차를 만든다 해도 주로 단순한 향을 첨가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니나스도 원래는 17세기부터 꽃의 에센스를 추출해서 프랑스 왕실에 납품하던 유서 깊은 향수 제조사였다고 한다. 다른 프랑스 브랜드들과 마찬가지로 니나스에도 갖가지 꽃과 과일 향을 입힌 홍차가 많고, 그 중 여러 제품을 남산점에서 마실 수 있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작은 가게 안에 환상적인 향기가 피어올랐다.
뜨거운 물 외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 스트레이트 티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떼 쉬르 라 륀이라는 찻잎으로 만든 밀크티다. ‘떼 쉬르 라 륀’은 프랑스어로 ‘달 위에서 마시는 차’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화적인 이름에 어울리는, 블루베리를 중심으로 여러 과일의 새콤달콤한 향이 나는 홍차였다. 니나스 티룸에서는 그 찻잎을 조금 진하게 우린 후 우유와 설탕을 넣고 우유거품과 블루베리 시럽으로 장식한 밀크티를 팔았다. 산뜻한 과일 향이 생각보다 우유와 잘 어울려서 놀랐다. 나중에는 찻잎을 사서 집에서도 여러 번 우유와 설탕을 타서 마셨다. 그래도 티룸에서 우유거품과 블루베리 시럽을 얹어 마시던 맛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니나스 파리는 그 후 오래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철수했다. 니나스의 마지막 한국 매장이었던 남산점도 함께 없어졌다. 한국의 홍차 시장은 틈새시장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쉬웠다.
찻잎은 곧 국내의 여러 수입사를 전전하며 다시 수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에(지금은 해외직구만 가능한 듯하다) 니나스의 향기로운 홍차는 집에서도 마실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아담하고 조용한 니나스 남산점에서 마시던 블루베리 향 밀크티가 생각난다. 이 글을 다듬는 지금은 Because I Love You를 오랜만에 다시 듣고 있다.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bergue.jp/blog/%E3%83%86%E3%83%A9%E3%82%B9%E5%BA%97/1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