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04
통역번역대학원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2011년 2월, 1주일간의 개강 전 예비 과정을 듣게 되었다. 운 나쁘게도 기록적인 2월 한파가 함께 왔던 주였다. 첫날부터 영하 18도까지 떨어지고 눈도 10cm쯤 왔다. 그래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해서 힘들게 합격한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나갔다.
첫날부터 번역 과제가 나왔고 바로 다음날 제출해야 했다. 그래도 모처럼 외출을 했으니 집보다는 카페에서 뭔가 맛있는 것을 먹으며 천천히 과제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홍대 앞 카페 탐방에 조금씩 재미를 붙이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대학원에서 가까운 홍대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제일 따뜻한 옷이었던 엄마의 알파카 코트를 빌려 입고,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운동화를 신은 어색한 옷차림으로 혼자 신나게 홍대 앞을 걸었다.
전에는 가본 적 없는 우라라라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바깥에 내건 디저트 사진 중 일본식 단팥죽인 젠자이가 추위 속에서 나를 유혹했다. 얼른 들어가서 망설임 없이 젠자이를 주문했다. 식사가 아니라 간식이기 때문에 작고 부담 없는 크기의 그릇에 나왔다. 그래도 간식치고는 든든했다. 달고 뜨끈한 단팥죽 위에 구운 찰떡, 설탕에 조린 밤, 단호박 페이스트가 올라가 있었다. 유리벽 너머의 한파 속 풍경마저 따뜻해 보이는 맛이었다. 당분이 공급되니 과제를 할 의욕도 났다.
당시에는 아직 몰랐는데 일본식 단팥죽에는 젠자이(ぜんざい)와 시루코(汁粉)라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서쪽 지역 기준으로 젠자이는 팥 알갱이가 살아있는 단팥죽, 시루코는 팥을 곱게 으깨고 껍질을 걸러내서 팥의 형태가 남아있지 않은 단팥죽을 가리킨다(동쪽 지역에서는 두 가지 모두 시루코라고 부른다). 두 단팥죽의 공통된 특징은 장아찌와 함께 단짠단짠으로 먹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거기에 녹차까지 곁들여서 녹차의 상쾌한 떫은맛이 더해진 단짠떫단짠떫(?)을 즐기기도 한다. 우라라의 젠자이도 짭짤한 다시마 절임과 함께 서빙되었다. 녹차는 내가 따로 주문했다.
그 후로도 가끔 찾아간 우라라는 정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일본풍 디저트 카페였다. 2010년 전후로 일본풍 카페가 조용히 유행했던 것 같다. 우라라라는 이름도 ‘화창하다, 명랑하다’라는 뜻의 일본어였다. 작은 매장의 한 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이름처럼 화창한 날에는 햇살이 가게 전체를 채웠다. 인테리어와 그릇 모두 단순하고 깔끔한 가운데, 테이블마다 놓인 앙증맞은 촛불과 화분이 생동감을 줬다.
주력 메뉴는 제노와즈(스펀지케이크)에 다양한 토핑을 올린 것이었다. 주문을 받자마자 바로 구워내서 촉촉하고 폭신폭신했다. 일본식 디저트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과 식감이었다. 식물성 유지를 섞지 않아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100% 동물성 생크림이 주목받기 시작한 당시, 우라라에서도 100% 동물성 생크림을 사용했던 것 같다.
단골까지는 아니었어도 종종 가고 싶은 가게였는데 우라라는 2011년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서울, 특히 홍대에서 작은 가게들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라라가 있던 자리는 유난히 가게가 자주 바뀌는 것 같다. 어느 웹툰에서 본 문구가 생각난다. ‘서울은 거대한 팝업스토어.’ 그 웹툰의 배경도 홍대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팝업스토어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지역 중 하나인 홍대, 그 한 귀퉁이에서 얻은 따뜻하고 화창한 기억만이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