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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서울은 거대한 팝업스토어

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에필로그

by 이정미

대학교 마지막 학기 때 홍차에 푹 빠졌다. 자연스럽게 찻집에 다니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다. 20대 중반쯤 되자 그전까지 속이 쓰리고 심장이 뛰어서 마시지 못했던 커피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선택할 수 있는 카페의 폭도 넓어졌다. 프리랜서가 되면서 집이 일하는 공간이 된 대신 카페가 일을 잊고 휴식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평일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프리랜서의 또 한 가지 특징이자, 카페에서 다른 손님들과 부대끼지 않고 편안히 앉아 있기에 아주 유리한 장점이었다. 이렇게 해서 카페 탐방은 내 취미로 점점 자리 잡았다.


지금은 다른 취미에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있어서 예전만큼 카페에 많이 다니지는 않는다. 거기다 코로나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은 외출을 줄였던 시간도 꽤 길어서, 그동안 감이 떨어졌다고 할까, 흐름이 끊겼다고 할까. 그래도 일부러라도 가끔 시간을 내서 단골 카페들에 가고, 몰랐던 가게를 조금씩 발굴하기도 한다. 향기로운 홍차와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편안하게 앉아 있는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행복을 준다. 재충전을 위해 캠핑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재충전을 위해 카페에 가는 것 같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카페에 다니다 보니 내가 아끼던 카페가 하루아침에 폐업하는 일을 여러 번 겪게 되었다. 그래서 만화 ≪재윤의 삶≫에서 <서울은 거대한 팝업스토어>라는 에피소드를 봤을 때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공감했다. 두 여행자가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홍대 앞의 하룻밤을 만끽하고는 1년 후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약속 장소로 정한 식당이 그새 없어지고 만다는 내용이다. 서울에서는 수없이 많은 가게가 짧은 시간 동안 문을 열었다가는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아서 정말로 팝업스토어를 연상시킨다.


폐업을 하는 모든 가게가 ‘망한’ 것은 아니라고 짐작한다. 내 친척 중에는 심지어 식당을 하다가 장사가 너무 잘 되는 바람에 몸이 고달파서, 가게 문을 닫고 더 편안한 직업으로 옮겨 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는 장사가 잘 된다면 폐업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많은 사장님들은 폐업 후 어디로 가는 걸까? 가끔 그 생각을 하며 마음이 무겁다.


스마트폰을 쓰게 되고 나서 내가 카페에서 먹고 마신 것들의 사진을 차곡차곡 남겼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더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시기도 있지만 페이스북에 올리지 않은 사진은 그보다 더 많다. ‘난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음식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었지?’ 라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쓸 곳이 생겨서 기쁘다. ‘내 테이블만 찍지 말고 가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좀 찍어 둘걸.’ 하는 아쉬움도 글을 쓰면서 많이 느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될 줄 그때 알았다면, 하는 부분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사장님들과 한두 마디라도 더 대화해 볼걸. 여러 가게를 좀 더 골고루 다닐걸. 뭐라도 더 기록으로 남겨둘걸. 그래도 그때는 몰랐으니 어쩔 수 없다. 글로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경험을 글로 쓰게 되었으니 오히려 보너스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옛날에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구도나 빛의 방향은 고사하고, 기본 중의 기본인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사진이 참 많다. 사진이 취미인 전남친 현남편의 꾸준한 지도를 받으면서 점점 나아졌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다.


글을 쓸 때는 내가 찍은 사진과 예전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며 기억을 최대한 되살렸다. 그래도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에도 많이 의지했다. 주로 블로그에서 정보를 얻었는데, 업데이트가 멈춘 지 오래된 블로그가 한둘이 아니었다. 정성스러운 카페 방문기를 올려두었을 뿐 아니라 블로그를 폐쇄하지 않고 남겨 둬서 내가 참고할 수 있도록 해 준, 이름 모를 수많은 타인들에게 감사한다.


지금은 없는 장소들을 나열한 목차가 마치 전사자 명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어두운 비유인가? 서울을 사랑하지만 서울은 참 전쟁터 같은 도시다. 그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해 준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카페들에 감사한다.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facebook.com/EXISTasJY/posts/2553452561348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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