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번외편 2
헐리웃 스타의 결혼생활이 10년을 넘겼다면 백년해로한 것으로 쳐 줘야 한다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카페가 10년을 넘겼다면 노포로 쳐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종종 든다. 모든 카페가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처럼 300년 넘게 영업할 필요는 없지만, 웬만큼 입소문이 난 가게도 채 10년을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허무하다.
그래도 10년 넘게 원래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사랑받는 카페도 아주 드물지는 않다. 지극히 내 개인의 취향과 편애로 선정한 세 곳을 소개한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티앙팡. 20년도 더 전인 2001년에 문을 열었으니 정말로 노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인데, 남편은 화교 3세이고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한국에 건너와 살다가 한국인인 부인과 결혼했다. 중국과 일본은 모두 한국보다 차를 많이 마시는 나라다. 홍차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2001년의 한국에서 홍차 전문점을 연 과감한 선택에는 사장님 부부 중 남편의 문화적 배경도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티앙팡은 개업 후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대 앞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 처음에는 10평 남짓의 작은 가게로 시작했다고 들었고, 곧 맞은편 건물의 더 넓은 지하 1층으로 옮겨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한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다. 그리고 최근에 옆 건물의 1층으로 다시 이사했다. 지하일 때의 아늑함도 좋았지만 햇빛이 드는 지금 공간의 산뜻함은 더 좋다. 그래도 리모델링과 이사를 거치는 와중에도 가게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요즘 카페에는 드문 천으로 된 소파, 묵직한 나무 테이블, 흰 바탕에 푸른 무늬가 있는 쯔비벨무스터 식기가 한결같이 맞이해 준다.
사람마다 티앙팡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언급되는 티앙팡의 장점은 요즘 말로 홍차에 진심이라는 것이다. 한중일 3국을 오가며 차를 공부하고, 차에 대한 강의를 하고, 저서를 내고, 심지어는 직접 찻잎을 재배하기까지 한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이니 전문성 면에서 거의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홍차 종류도 정말로 많다. 한때는 무려 400종류에 달하는 홍차를 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나마 메뉴를 좀 축소했다. 유명 브랜드의 홍차와 원산지에서 직접 수입하는 홍차가 모두 있다. 찻잎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그 찻잎에 갖가지 재료를 더한 밀크티와 아이스티도 다양해서 매번 무엇을 마실지 고민된다.
다른 카페보다 훨씬 두툼한 메뉴판에는 홍차뿐만이 아니라 허브차, 녹차, 청차, 보이차도 물론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옛날에는 커피가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차보다 커피를 좋아하는 손님들을 배려해서인지 몇 종류 갖춰 뒀다. 디저트 중에서는 느끼하지 않고 고소한 우유 맛이 나는 치즈케이크가 제일 유명한 모양이다. 탱글탱글한 우유푸딩, 주문을 받은 후에 구워서 따끈따끈한 스콘도 별미다.
델문도. 2008년 1월에 개업해 15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엉뚱하고 재미있는 한국 여행기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어느 일본인이 시작한 일본식 카페다. 2011년 초대 사장님이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국인 직원들이 넘겨받아서 최대한 똑같은 방침과 분위기로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이제 10년도 더 전의 일이 되었으니 시간이 참 빠르다. 홍대, 합정, 상수의 중간에 있어서 어디에서 가기에도 애매한 위치일 뿐 아니라 구석진 건물 2층에 숨어 있는데도(심지어 초기에는 간판도 없었다), 인터넷을 통한 조용한 홍보와 입소문만으로 수많은 단골을 확보해 여기까지 왔다.
델문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지트 같은 카페’라고 할 수 있겠다. 밖에서 볼 때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입구도 마치 아파트 현관문처럼 튼튼한 철문이고, 그 문을 힘껏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내부도 기분 좋게 어둑어둑하고 조용해서 비밀스러운 느낌이 든다. 거기다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일부러 벽을 쌓아서 주위와 분리한 1인석까지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비밀 공간 속의 또 다른 비밀 공간에 숨은 느낌이다. 초대 사장님과 남동생이 직접 공사하고 꾸민 내부는 적당히 투박하고 복고풍인데, 그게 또 아지트 분위기를 더한다. 2000년대 후반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노출콘크리트 카페 1세대 같은 느낌도 든다.
일본인이 창업한 가게인 만큼 평균적인 한국 카페와는 메뉴가 상당히 다르다. 심지어 초기에는 커피를 단 한 종류도 팔지 않는 ‘커피 없는 카페’를 특징으로 내세웠다. 커피가 메뉴에 추가된 지 오래된 지금도, 세상에 커피 말고도 마실 것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다채로운 재료로 만든 수많은 음료가 있다. 종류는 적지만 마치 식당처럼 제대로 된 식사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도 델문도의 큰 장점이다. 음료, 디저트, 식사 모두 일정한 기간 동안만, 또는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만 판매하는 한정 메뉴가 많기 때문에 인스타그램 또는 트위터의 최근 게시물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몽카페 그레고리. 합정에 2011년 문을 열었다. 구조가 조금 특이해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2층과 3층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보다도 더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야 하지만 나는 항상 3층으로 간다. 더 조용하고 공간도 더 넓을 뿐 아니라 지붕 일부가 투명해서 탁 트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자연광이 듬뿍 들어와서 사진이 잘 나오는 것은 덤이다.
프랑스어로 된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 프랑스풍의 디저트가 메뉴판의 맨 앞에 있다. 바삭한 패스트리 종류가 가장 많고 무스케이크도 몇 가지 있는데 하나같이 맛있다. 그렇다고 해서 메뉴 전체가 프랑스풍은 아니다. 뉴욕의 레스토랑 세렌디피티의 프로즌 핫 초콜릿을 재해석했다고 하는 ‘세렌디피티 프로즌 핫 초콜릿’이 눈에 띈다. 접시와 홍차 잔은 대부분 웨지우드를 사용해서 눈도 즐겁다. 카페에서 식기를 훔쳐가는 진상 손님이 아주 흔하다고 들었는데, 11년의 세월 동안 웨지우드 도난 사건도 많지 않았을지 궁금하다.
내가 사랑하는 카페답게 홍차도 꽤 많이 준비되어 있다. 이 가게의 홍차 메뉴에는 특이한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오직 프랑스 브랜드 마리아쥬 프레르의 제품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딱 하나, 일본 브랜드 루피시아의 사쿠람보만이 예외다. 둘째는 아이스티로 주문할 수 있는 홍차가 따로 정해져 있고, 그 외의 홍차는 따뜻하게만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밀크티가 세 종류 있는데, 찻잎과 우유를 같이 끓인 ‘로얄 밀크티’는 없고(사실 로얄 밀크티는 미국 브랜드 립톤이 일본인 소비자들을 위해 개발한, 살짝 국적불명의 음료다) 모두 홍차를 먼저 우려낸 뒤 우유를 섞은 영국식 밀크티라는 점이다. 평균적인 한국 손님들에게는 낯설 것 같지만 거의 매일 아침 영국식 밀크티를 마시는 내게는 반갑다. 전체적으로 사장님의 확고한 철학을 고수하면서도 그 안에서 최대한 넓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가게인데 그 중에서도 홍차 메뉴가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