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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Nov 10. 2016

엄마의 채송화

기억

나의 기억 속에서 첫 강아지는 ‘검비’라는 이름의 검은색 믹스견이다. 어린애 몸통만 했고 햇볕에 바랜 검은색 털이 등에서 시작해 땅에 닿을 만큼 자라 있었다. 흙과 먼지가 묻은 이마의 털이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는데 골목을 달려 나갈 때 보이는 그 눈동자만큼은 명료하게 반짝였다. 검비와 나는 나무판자를 대충 이어 붙인 개집에서 함께 잠들곤 했다. 그를 사랑했기에 냄새가 나고 오물이 묻은 담요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검비는 집을 나갔다. 매우 슬펐지만 검비가 집을 나간 것이지 나를 떠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까지도 나를 올려다보던 검비의 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사랑이나 우정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 기억은 형상화된 이미지라기보다는 은은한 햇살이나 살결에서 나는 향기에 가깝다. 그리고 어느 날 영혼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나 여기 있어’라고. 살아서 움직이든, 그렇지 않든 생명을 키운다는 건 삶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이다. 그래. 나는 강아지에 마음을 쏟아보기는 했지만 꽃이나 나무를 가꿔본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식물에 대한 엄마의 기억을 복기해보니 내가 동물을 생각하는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대문과 현관문 사이에 조그만 텃밭이 있었다. 화창한 봄날엔 햇살이 오래 머물다 가는 마당. 엄마는 여기에 상추나 고추 모종보다는 알록달록한 꽃을 가꾸길 좋아했다. 학창 시절 신작로와 장독대에 늘 피어 있던 맨드라미와 봉선화가 어느 날 우리 집 화단에서 개화하면 엄마는 유년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마음이 됐다고 한다. 그중에도 가장 아끼는 꽃은 채송화였다. 바지런히 저축한 돈으로 이사를 하던 날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가 주고 간 꽃씨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기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생전 눈이 어두웠던 할머니는 시골 마당에 예쁘게 핀 채송화를 보고 딸에게 전해주기 위해 씨앗을 받아두셨는데 모르고 상추씨를 가져왔던 것이다. 엄마는 그걸 채송화인 줄 알고 심었지만 한참 후에야 상추인 걸 알고 할머니에게 역정을 냈단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그다음 해마저 상추씨를 가져왔고 씨앗을 받아둔 지 3년째에야 마침내 제대로 된 채송화 씨앗을 가져다주셨다. 할머니는 딸에게 그 씨앗을 꼭 가져다주고 싶으셨나 보다. 이듬해 여름 채송화가 발아해 딱 한번 꽃을 피우고 겨우내 그 종자들이 땅속에서 동면할 때 할머니도 흙속으로 되돌아가셨다. 엄마는 이사와 이사를 거듭해 세간을 줄여나간 지금의 집에서도 할머니가 주고 간 그 채송화 씨앗의 혈통을 간직한 화분만은 버리지 않는다. 너른 마당에서 창가의 조그만 화분으로 면적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겨울에는 비어 있는 화분인 줄 알았는데 날씨가 따뜻해지자 채송화 싹이 움트고 있다.
엄마의 봄.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운전을 하다 도로 곁에서 분양해왔다며 담홍색 꽃을 한가득 심었더니 어느새 화단 한편을 가득 채웠다. 나중에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일명 꽃잔디라고도 불리는 플록스(Phlox)였다. 엄마는 이름이 예쁘다며 이 꽃을 무척 아꼈다. 민들레를 꺾어서 반지나 팔찌를 곧잘 만들어줬고 연례행사처럼 봉숭아 물도 들이곤 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여름방학이 막 끝난 교실에서 붉게 물들인 손톱을 자랑하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봉숭아꽃의 숨이 죽을 때까지 두었다가 잎, 소금, 백반을 조금씩 섞어서 빻으면 고운 물감이 만들어졌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와 새끼손톱 정도만 물들이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 집 안에서 키운 식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꼭 한 번 행운목이 꽃을 피운 사건이다. 불규칙한 주기로 수년에 한 번씩 피는 이 꽃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실제로 행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행운이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꽃처럼 피었다 지면서 잊히는 존재니까.


엄마와 함께 떠올려낸 식물의 기억은 놀라웠다. 검비, 꽃님이, 진돌이로 이어지는 강아지에 대한 추억은 내게 느꺼운 마음이 들게 했고 엄마는 꽃으로 당신이 살아온 순간을 선명하게 설명해냈다. 맨드라미와 봉선화는 학창 시절을, 채송화는 할머니를, 행운목은 한때나마 풍족하게 살았던 시절을 은유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꽤 많은 다육식물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흙만 담겨 있어 빈 화분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지난해 한해살이 꽃이 피고 지며 종자를 흘려놓은 소중한 생명의 터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누군가 마음을 주고 가꾼 화단이든 알아서 쑥쑥 자란 길가의 잡초든 자연의 생명력이 우리에게 주는 에너지는 언제나 바르다. 그러니 나도 언젠가 조그만 화분에 옮겨 심어둔 채송화의 개화를 기다리며 엄마를 떠올릴 때가 올지도 모른다. 엄마와 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이 타임머신처럼 단단한 기계가 아니라 저 채송화라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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