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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Mar 20. 2021

느티나무_병자호란 운명의 증인

Zelkova Tree ,  槐木

느티나무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김훈의 남한산성 中]


분류

쐐기풀목 > 느릅나무과 > 느티나무속  

꽃색

녹색, 노란색  

학명

Zelkova serrata (Thunb.) Makino  

개화기

4월, 5월  

분포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에 분포.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 산성으로 성곽 전체 길이가 약 12.4㎞이다.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다. 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672년 신라 시대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산성을 쌓았다.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은 당나라 외세의 도움을 받은 불완전한 통일로, 당나라는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할 때 무려 10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고, 그 군사가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반도에 주둔하여 신라까지 넘보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전국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주장산에 석축산성을 쌓아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를 토대로 당나라와 일전을 벌여 백수성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매초성 전투,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여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보존하였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가을.


그 후 조선 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전환기 전운이 감돌 때 인조는 신라 주장성의 옛터 위에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대대적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자신도 앞으로의 환란에 대비하여 성에 머물 행궁도 남한산성 안에 건립했다. 성 안 각종 시설을 정비하여 전쟁에 대비했는데,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완비된 시설을 갖추었다. 병자호란이 반발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떠나 청나라와 항전을 하였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명분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정세를 헤아려보고, 청나라가 곧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성을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었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겨울.


특히 산성 사대문 중 가장 큰 지화문은 한강과 한양 도성을 내려볼 수 있게 장대도 지었고, 성곽 사면 흙이 유실되는 것을 막고 지화문을 적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느티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 느티나무가 자랄 때는 곧바르고 우람한 덩치로 수십 미터 높이까지 자란다. 웅장한 남한산성 남문 앞 수호목으로도 제격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일만 사천의 군사와 함께 사대문 중 가장 큰 남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그때 느티나무 네 그루가 임금의 행렬을 맞이하였다. 곧이어 청나라 용골대를 선두로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은 한겨울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처절한 전투를 시작했다. 남문 앞 느티나무는 청군이 쏘아대는 홍이포에서 무사했지만, 조선군의 시체가 성 밖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남문 앞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번호 경기 성남-20, 21, 22, 23(수령 400년)


산성에 고립무원 신세에서 45일간 항전 끝에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로 말미암아 조선 조정은 끝내 치욕을 감수하고 성문을 열고 만다. 청 태종에게 항복하러 나갈 때 남문 앞 느티나무는 임금을 배웅하지 못했다. 청나라 태종이 죄인은 서문으로 나오라고 하여 인조는 신하 몇 명과 함께 서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는 해가 떠오르는 남문이었고, 항복하러 갈 때는 해가 지는 서문을 나왔으니 조선의 흥망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궤를 같이 했다. 


청나라 대포에도 끄떡없던 느티나무가 간 밤 폭풍우에 줄기가 부러지고 말았다.


남한산성 성곽이 준공되었을 때 지화문 앞에 심어진 느티나무는 지금 수백 년 나이를 먹고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앞에서 느티나무 육중한 몸은 쇠잔해져 줄기 태반이 도려지고 시멘트로 충전되었다. 지난 태풍 때 나무줄기가 쪼개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생명력을 잃고 마치 육중한 콘크리트 기둥 형상처럼 보인다. 굵은 나뭇가지도 하나 갈라져 나온 것도 스스로 버틸 재간이 없었는지 쇠파이프로 받쳐있었다. 고개 들어 보니 아름드리나무 우듬지에 노란 잎사귀가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남한산성 남문 앞 느티나무. 통한의 역사 앞에 수령이 다한 듯 쇠약해진 모습으로 서있다.


고을마다 얽힌 오랜 이야기는 으레 마을 어귀에 큰 그늘이 있는 정자나무 밑 평상에서 들을 수 있다. 그 정자나무가 느티나무다. 지화문 앞 수백 년의 세월을 지킨 느티나무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못 비장하다. 병자호란당시 처절한 전투와 항복 후 포로로 끌려가는 조선 백성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는 전쟁 당시 용케도 청나라의 대포에 맞아 쓰러지지 않았지만, 나라의 비극적인 변고를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수령이 36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 수명이 다한 것인지 나무는 시름시름 앓았다. 나무는 쓰라렸던 긴 세월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많이 지쳐,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느릅나무과 느티나무는 높이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퍼지며 뻗는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잘 자라는 느티나무는 옛 부터 마을 어귀 정자나무로 심었다. 정자나무로 보살핌을 받는 나무는 수령이 천년을 넘기도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기도 한다. 긴긴 세월을 이어오면서 맞닥뜨린 민족의 비극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 오면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느티나무 잎은 어긋나기로 긴 타원형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핀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수명이 가장 긴 나무다. 전국 지자체가 관리하는 고목나무는 대략 1만 3천여 그루가 되는데 그중에서 7천여 그루가 느티나무다. 천 년 이상의 고목 60여 그루 중 25그루가 느티나무일 정도다. 그래서 각 고을마다 내려오는 전설이나 옛이야기는 느티나무와 얽혀 있다. 

느티나무 잎은 잎맥을 경계로 양쪽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는 느티나무는 키가 30m까지 자라 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시골에 가보면 느티나무 아래에는 으레 평상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느티나무가 만들어준 커다란 그늘에서 시골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거나 탁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느티나무 잎은 가을이 되면 붉은빛 노란빛으로 단풍이 든다.


느티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이라고 쓴다. 괴(槐)는 木자와 鬼자가 합쳐져 글자를 이루어지는데 풀이하면 나무와 귀신이 함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예부터 느티나무는 신목(神木)으로 신성시하여 마을 앞에 수호목으로 심고 부처님 목상을 만들 때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궁궐의 기둥으로 쓰였다. 

느티나무 어린잎은 독성이 없어 떡을 찔 때 같이 버무려 먹기도 한다.


왕이 있는 궁궐을 괴신(槐宸)이라고 하는데, 느티나무 괴(槐)란 글자가 존귀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느티나무를 사용하여 신라시대에는 임금의 시신을 모신 관재를 만들고 천마총을 비롯한 여러 고분에 모셨다. 또한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법보전, 화엄사 등 많은 사찰에도 느티나무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느티나무는 소나무보다 궁궐이나 사찰에 더 많이 사용되었다. 

노란빛으로 물든 느티나무


느티나무 괴(槐) 글자는 원래 회화나무 괴이다. 느티나무나 회화나무 모두 괴목(槐木)으로 쓰지만 원조는 회화나무였다. 우리에게는 중국이 원산지인 회화나무보다 느티나무가 친숙하지만, 사실 회화나무가 중국 유교문화에서 유학을 대표하는 나무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회화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성리학을 상징하는 나무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많이 심었다. 그런데 회화나무가 유교의 상징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목으로 다루어졌던 느티나무를 회화나무를 대신하여 서원에 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티나무는 회화나무 보다 더 잘 자라고 더 오래 살고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느티나무 어원을 회화나무에서 찾는다. 회화나무와 비슷하지만 늘 우리 곁에 있는 늘 회화나무가 '늘회나무'로 바뀌고 느티나무로 불렸다는 것이다. 

회화나무와 비슷하다 하여 늘회나무로 불리다가 느티나무로 되었다. [사진은 회화나무]


예부터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은 이름의 어원에 대하여 많이 설왕설래한다. 느티나무도 마찬가지다. '늦게 티가 나는 나무'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릴 때는 그저 그런 나무였다가 다 자라 수관이 울창해지면 비로소 느티나무의 진면목이 늦게 나타난다고 하여 느티나무라는 것이다. 

또는 '괴다'라는 글자가 '사랑하다'라는 순우리말이고, 예부터 우리에게 사랑받는 나무라 하여 사랑(괴)+나무(목)로 한자음을 빌려 표기하였다고도 한다. 또,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든 것을 보고 노란 회화나무로 불리어 한자로 누룰 황(黃)의 '눌(?)'자와 회화나무 '괴'자가 합쳐 '느틔나모'에서 유래[김민수의 우리말 어원사전 中]했다고도 한다. 

느티나무 껍질은 비늘처럼 떨어지고 껍질눈은 가로방향으로 길어진다.
남한산성 남문 밖 느티나무. 성남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느티나무 꽃말은 운명. 병자호란 비극의 운명의 증인으로 우리나라 아픈 역사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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