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행 Sep 26. 2018

말조차 쉬어 넘는 고개 갈마치고개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 영장산길

갈마치고개 생태이동통로


성남 누비길 세 번째 구간인 영장산길은 갈마치고개를 시점으로 고불산과 영장산 정상을 넘고 거북터를 지나 곧은골 고개와 새마을 고개 그리고 태재고개를 넘나드는 총 9.7km의 숲길이다. 검단산길 종점과 영장산길 시점인 갈마치고개는 갈마치로라는 이차선 왕복 도로가 성남 갈현과 광주 광남을 잇는다. 성남 영생관리사업소를 지나는 본 도로는 한적하여 차량이나 사람의 왕래가 적다. 그러다 보니 고라니나 청설모 등 크고 작은 짐승들이 갈마치로에 의하여 끊어진 산에서 내려와 도로를 지나 건너편 산으로 종종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정상 고개에는 영장산 권역과 검단산 권역의 생태계 연결을 위하여 동물이동통로가 있다. 그렇다고 동물들에게 생태이동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무단 횡단한다고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동통로의 안내판에는 '도로로 단절된 야생동물의 생태 녹지축을 연결하고, 특히 야간에 로드킬로 인한 차량 교통사고 위험을 사전 예방하고자 생태통로를 시범 조성했다'라고 하지만, 짐승들이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법, 다만, 등산객들이나마 동물들이 맘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조용하게 다녀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누비길 검단산 종점과 영장산 시점을 잇는 생태이동통로는 사람이 지나가는 1.5m 폭의 나무데크 통로 옆에 장벽처럼 방부목재가 높게 설치돼 있고, 나무벽 건너편으론 동물들이 다닐 수 있게 했다. 에코브릿지에 야생동물들이 마음 놓고 다니려면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 동선과 상충하지 말아야 하는데, 사이에 가림막이 처져 있는 것만으로 동물들이 안심하고 지나다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누비길 세번째 구간 영장산길 초입.



말조차 목마름에 쉬어 넘는 고개, 갈마치고개


갈마치고개는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에 있으며, 그 고개를 갈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칭은 옛날에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여 갈증을 풀어준 뒤 다시 길을 떠났다고 하여 갈마치 또는 갈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백제 기마병들이 훈련할 때마다 고개가 가팔라 말조차 목말라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가끔 칡이 많은 곳이어서 갈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는 이야기가 나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1914년 행정구역 변경하면서 칡이 많은 곳이니까 칡 갈葛자로 쓰라는 일제의 강요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일본은 우리 고장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지명을 철저하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버렸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기간 우리 민족을 핍박하기 위해 조선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하면서 우리 고유 지명도 일본식으로 고쳤다. 그때 군 이름 97개와 면 이름 1,834개, 리·동 이름 3만 4,233개가 없어지고, 일본식으로 새로 지어진 지명이 1만 1,000여 개에 달했다. 일제는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하여 조선인의 정서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대신 피식민지 계급에 순응시키는 속셈이 있었다. 

갈마치고개에서 영장산 오르는 된비알. 활엽수림 밑으로 침목계단을 올라간다.

영장산길 중 중원구 방면은 다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식생이 잘 발달되어 있고 나뭇가지가 길을 가릴정도로 생육이 왕성하다. 물론 참나무가 우점종이기는 하지만, 소나무, 잣나무, 리기다소나무의 상록 침엽수와 박달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등의 낙엽활엽수림들이 공존하고 있는 혼효림 형태이며, 하층 식생으로는 고비고사리와 잔대, 그늘사초 등이 자라고 있어 자연 생태계가 잘 보전되고 있다. 

침엽수영장산길에서 능선따라 만나는 전나무 침엽수 숲길. 피톤치드가 물안개에 묻혀 연신 피어나온다.



맹정승이 잠든 고불산


3구간 시작하는 길은 영장산을 오르는 길목과 동시에 망덕산에서 내려오는 갈마치고개다. 매우 가파른 고갯길이라 옛날 옛적 말을 몰고 넘으면 말이 헐떡거려 물을 먹이며 갈증 풀어주고 넘었던 고개다. 가파른 고개는 그 끝이 나올 것 같지 않고 그만큼 올라가는 길이 쉽지 않다. 아래에서 보이는 봉우리에 올라 다 왔다 싶더니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내려간 만큼 오르기를 반복한다. 내려가는 길도 편하지 않고 다만, 고불산 꼭대기에서 정점 찍고 길은 완만해지며 비로소 한숨 돌리며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고불산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와 돌무덤

고불산의 고불은 한자로 ‘古佛’이다. 그리고 고불의 명칭은 조선 세종시대 명재상인 맹사성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실제 맹사성 묘가 영장산 기슭인 광주시 직동에 있다. 고불은 오래된 부처라는 뜻인데 맹정승은 본명보다 맹고불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고불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성남 시가지


고불산에서 영장산 방향으로 광주 쪽으로 내려가면 직동에 맹사성 선생 묘가 있다. 

조선 세종 때 황희 정승과 더불어 청백리 재상으로 유명한 맹사성 선생의 묘소에는 잘 가꾸어진 봉분과 상석, 석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맹사성의 묘 한쪽에 흑기총이라는 소 무덤이 있다. 맹사성 정승은 재상을 맡았을 때에도 항상 검소하여 길을 갈 때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하여 소에 관해 일화가 많다. 그 이야기 속 실제 주인공인 소가 묻힌 무덤이 바로 흑기총이다. 그 무덤에 가면 다음과 같은 해설판이 있다.


‘고불 맹사성 정승이 온양 고택 뒤 설화산 기슭에 봄 경치에 취하여 오르던 중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검은 짐승을 보고 아이들에게 호통을 쳐서 아이들은 달아나고 검은 짐승이 고맙다는 듯이 정승에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접근하더니 집에까지 따라와 할 수 없이 하인을 시켜 기르게 하니 잘 자랐다. 그 후 고불 맹정승께서 온양에서 한양을 이 검은 소(흑기 = 黑麒)를 타고 왕래하시게 되었다. 고불이 서거하자 검은 소는 주인 잃은 슬픔을 못 이겨 먹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불이 그 얼마나 검은 소를 사랑했기에 말 못 하는 짐승도 주인이 죽자 자기도 고통을 참아가며 굶어 죽었으랴, 그래서 이 검은 소의 장례를 치러주고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주니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 지어주고 해마다 벌초를 해주고 잔을 부어 준다.’
맹사성의 묘. 좌측 박스는 흑기총의 무덤이다.[사진 출처 광주시청 자료실]


백성을 너그러이 대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실행했던 청백리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그가 남긴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또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며, 계절별로 자연을 즐기는 정승의 흥취를 느낄 수 있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濁醪) 계변(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실어 흘리띄워 던져두고
이몸이 소일(消日)하옴도 역군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이 남다.
삿갓 비끼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몸이 춥지 아니 하옴도 역군은이샷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한 사랑의 맹세, 연리지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