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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Aug 21. 2022

피나무_피 울음으로 넘은 혈읍재

Amur Linden, 椵木, Bee tree

피나무


선명한 산천은 흥취를 돋우는데
부질없는 벼슬살이는 수심만 자아내네.
[악양정시서 中]


분류 

아욱목 > 피나무과 > 피나무속

학명 

Tilia amurensis Rupr.

분포 

중국, 극동러시아; 전국 분포.



청계산은 예전에 청룡이 산기슭에서 승천했다 하여 청룡산이라고 불렀다. 청룡이 살았던 만큼 숲은 푸르고 울창하다. 짙게 우거진 산림에는 청룡과 더불어 많은 짐승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래서 툭하면 조선 임금은 청계산 기슭으로 사냥을 자주 오곤 했다. 깊고 깊은 청계산은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다른 사람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도적들은 한양과 가까운 청계산에 숨어 살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도적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선비들도 찾았다. 유교를 닦는 선비들을 사림(士林)이라고 하는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선비들은 불의를 피하여 산림(山林)을 찾았다. 고려 말에는 유신 이색이 청계산에 숨어 살았고 조선 초에는 정여창 선생이 연산군을 피해 청계산으로 은신했다.


청계산 혈읍재


특히 정여창 선생이 청계산과 인연이 크다. 이수봉이란 이름도 정여창 선생이 두 번씩이나 목숨을 구했다 해서 이수봉이란 이름이 생겼다.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연산군을 피해 청계산에 몸을 숨겼지만, 결국 붙잡혀 유배 생활을 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다. 훗날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넋을 위로한답시고 죽은 정여창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하였다. 두 번 목숨을 건졌다지만, 두 번 목숨을 잃은 격이다.      

이수봉에서 매봉 넘어가는 고개가 혈읍재다. 처음 들었을 때는 혈읍재가 피를 토하고 넘는 고개라 해서 얼마나 된비알이기에 고개를 넘다가 피를 토하나 싶었다. 산을 넘다가 목숨이 깔딱깔딱하는 깔딱고개보다 더 독한 말이다. 그런데 혈읍재는 피 울음 고개라는 뜻이다. 정여창 선생이 연산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청계산에 은거할 당시 이 고개를 넘다 억울하게 죽은 스승과 지인들로 인해 원통해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 피 울음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혈읍재란 이름이 생겼다. 혈읍재 위 망경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정여창 선생이 피신하다 목을 적셨던 하늘샘이 있다. 산꼭대기 하늘과 맞닿은 샘물은 햇빛을 받아 금빛처럼 아름답다 하여 금정수(金井水)라 불렸다. 일설에는 정여창 선생이 유배 후 함경도에서 죽자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나중 복권되었을 때 핏빛이던 샘물이 다시 금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청계산 혈읍재 정상에 자라난 찰피나무


그 혈읍재 정상에는 그 어느 나무보다 크고 우람하게 자라난 나무가 있으니 바로 찰피나무다. 하도 원통하여 피가 나올 듯이 울며 넘는 고개 정상에 피나무가 있다니. 요즘 길마다 스토리텔링이 유행이던데 청계산 혈읍재는 정여창 선생이 내뱉은 핏자국마다 피나무가 자란 고개라면 참 괜찮은 소재 같다. 물론 정여창 선생이 청계산으로 도망쳐 피를 토하며 넘은 고개마다 피나무가 점점이 자랐지만, 산속 계곡 부위 토심 좋고 물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는 피나무가 그리 자랐을 뿐이다. 청계산은 맑은 물이 흐르는 산이라서 이름이 청룡산에서 청계산으로 고쳐 부른 만큼 물을 좋아하는 피나무가 그리 잘 자란 것이 이상할 것 없다. 더구나 피나무의 ‘피’ 자는 피(血)와 전혀 상관없다. 피나무의 ‘피’는 한자로 껍질 ‘피’(皮) 자를 쓴다.


찰피나무 잎은 어긋나기 하며 잔털이 있다. 


찰피나무 잎은 달걀형의 원형으로 하트 모양을 닮았다.


피나무 나무껍질은 곧게 올라가고 얼룩무늬가 있다.


피나무는 예전부터 나무껍질이 질겨서 어망 그물이나 지붕을 잇는 밧줄이나 새끼줄로 쓰였다. 피나무 껍질의 쓰임새가 많은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나무 영어 이름 Basswood의 bass는 bast(섬유)에서 나온 것이다. 간혹 Lime이나 Linden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질긴 껍질이란 뜻이 있다. 피나무 학명의 Tilia란 글자는 그리스어 틸로스(tilos)에서 유래하는데 역시 나무껍질의 섬유란 뜻이 있다. 식물의 학명을 만든 식물학자 린네(Linne)도 자기 이름이 피나무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나무 껍질이 유명한 이유는 나무껍질의 섬유질이 우수하여 삼배나 명주보다 질기고 물에도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피나무 껍질은 튼튼할 뿐만 아니라 까끄라기도 없이 부드러워서 옛날 휴지가 없을 때 똥을 누고 밑을 닦을 때 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밑씻개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나무의 쓰임새는 껍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나무는 중요한 밀원식물일 정도로 꽃이 피면 나무를 뒤덮을 정도로 풍성하게 피어 그윽한 꽃향기가 멀리까지 퍼진다. 꽃에는 달콤한 꿀도 많아 멀리서 날아온 꿀벌들의 수고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 피나무 꿀은 사람에게도 좋아 체온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도 잘되게 도와줘서 면역력에서는 최고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향기로운 피나무 꽃 때문에 꿀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피나무를 Bee Tree라고 부르기도 한다.      


찰피나무 꽃은 5월부터 7월까지 피며 밀생 한다. 


피나무 종류에는 찰피나무와 보리자나무가 있는데 잎이나 열매 모양이 비슷하다. 혈읍재 정상에 아름드리로 우뚝 솟은 나무는 찰피나무고 옛골로 내려오는 계곡마다 한두 그루씩 자란 것이 피나무다. 두 나무를 구분하는 특징은 잎이다. 피나무 잎은 가장자리에 규칙적인 톱니가 있는데 모양은 하트 모양이다. 차이점은 피나무 잎자루가 길고 찰피나무는 잎자루가 거의 없다. 잎의 형상과 털이 있고 없고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는데 잎 표면에 잔털이 있으면 찰피나무다. 또 찰피나무 둥근 열매가 피나무보다 두세 배 더 굵고 열매 아랫부분에 피나무는 줄이 없는데 반해 찰피나무는 줄이 하나 있다. 줄이 다섯 개 있으면 보리자나무다. 찰피나무 씨앗은 비교적 단단하여 스님들이 피나무 씨앗으로 염주를 만들기도 하여 피나무를 염주나무라고도 부른다.    

 

앞에서부터 피나무, 찰피나무, 보리자나무 잎과 열매.  (박승천님 블로그 참조)



보리자나무란 이름이 붙은 연유가 흥미롭다. 찰피나무와 닮은 보리자나무는 중국에서 들여왔다. 중국 사찰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를 경내에 심고 싶었지만, 보리수나무는 열대 지역에서만 자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큰 나무다.(보리수나무의 보리란 글자는 깨달음을 뜻하는 인도의 ‘Bodhi’를 음역한 것이다.) 결국 보리수나무는 중국 기후에서는 월동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보리수나무와 잎모양이 비슷한 피나무과 보리수나무를 절 주위에 심었고, 이런 풍습이 우리나라로 넘어와서 보리수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새콤달콤 맛있는 빨간 열매를 맺는 보리수나무(열매 안의 씨가 보리를 닮아 보리수란 이름이 붙었다.)가 이미 있어 이름을 보리자나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절가에서는 여전히 보리자나무를 보리수나무라고 부르고 찰피나무나 보리자나무, 무환자나무과 염주나무도 모두 열매로 염주를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염주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분별심의 발현이라고나 할까! 

피나무 잎은 찰피나무 잎보다 작으며 털이 없다.


피나무는 우리나라 중북부지방 숲 속 골짜기에서 자라며 높이 20m까지 자란다. 


그러고 보면 혈읍재를 오르내리며 찰피나무와 피나무를 구분하여 나무를 보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피나무를 붉은 선혈과 연관시켜 혈읍재에 피나무가 빨간 피가 뚝뚝 흘렀던 자국마다 자랐다고 하면 너무 어긋날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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