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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Jan 17. 2019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국사봉

제6구간 청계산길, 망국의 고려 충신이 목놓아 운 국사봉

청룡이 승천했던 청계산


누비길 제6구간 청계산은 해발 618m의 높이로 관악산과 함께 서울 남쪽 방벽을 이루고 서울과 성남, 과천, 의왕에 걸쳐있는 산이다.  고려말 이색의 시에서 청룡이 승천했던 곳이라 청룡산으로 불러지기도 했다. 청계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맑고 깨끗한데 청계산이 맑을 청(淸)과 계곡 계(溪)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계산의 주봉인 망경대를 비롯하여 매봉, 이수봉, 국사봉 등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져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 목은 이색, 일두 정여창, 추사 김정희 등 절개 곧은 선비들이 난세를 피해 청계산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기도 했다.  

청계산의 산림은 울창하여 과거에는 난을 피해 여러 선비들이 은둔하기도 했다.. 

누비길로 걷는 청계산은 하오고개를 시점으로 국사봉과 이수봉, 망경대 전망대, 혈읍재, 매봉을 거쳐 옛골 등산로 입구로 내려오는데 거리는 8.5km이고 소요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다. 봉우리 모두 500m를 넘는지라 누비길 전체 7구간 중 난이도가 가장 높기도 하다.  

누비길 제6구간 청계산길 입구. 하오고개 하부에 있다. 

누비길을 알리는 현판을 통과하여 목계단 완만한 경사로를 천천히 올라가면 능선에서 산 아래까지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다. 청계산길을 출발하자마자 대하는 공동묘지는 다른 숲길을 가다 보면 흔히 마주 볼 수 있는 봉분 서너 기 자리 잡은 묘지가 아니다. 일만 여기 될 정도의 묘지가 산 능선에서 아래 골짜기까지 가득 채웠다. 숲길 바로 옆까지 비석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바로 안양시립 청계공원묘지다. 공원묘지가 의왕시 청계동에 자리 잡아 산 능선까지 조성된 것이다. 


숲길 가까이에 묘지가 있으니 비명을 볼 수 있었는데, 거의 소천召天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소천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뜻이다. 죽음을 일컫는 말은 종교마다 달라 천주교는 소천 대신 선종이란 말을 쓰는데, 착하게 살다가 끝마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이나 입적이란 말을 쓰며 고뇌에서 벗어나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어떤 묘는 비석도 없다. 등산로 바깥쪽으로 분봉되어 곳곳이 움푹 함몰되었다. 자손들이 돌보지 않는 묘지만큼 황량한 풍경도 없다. 한낮에도 음습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국사봉 오르는 누비길 초입은 가파른 산세로 깔딱 고개로 불려지곤 한다. 

송전탑 주변으로 베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피어난 아담한 억새들을 지나치면 가파른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다. 누비길 중 하오고개에서 국사봉 오르는 길이 가장 가팔라 그쪽 등산로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등산 중간에 배낭을 내려놓고 목을 축여야 한다. 과연 얼마나 가파르나 궁금하던 찰나 오르자마자 다리가 후들후들 거린다.  청계산 등산로 중 정토사에서 이수봉 올라가는 길이 하도 급경사라 사람들이 오를 때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하여 깔딱 고개라 이름 붙였다. 누비길 2구간 갈마치고개는 이름만 들어도 목이 탈 듯했다. 반면에 하오고개는 학의 혈에 해당하여 하오고개라고 소개하지만, 다른 지방에 있는 하오고개의 지명은 고개가 험하고 높아서 학처럼 날아서 넘었거나, 고개가 급하게 비탈져서 넘을 때 숨이 차서 하우하고 넘어서라고 했다. 그러면 하오고개에서 국사봉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경사도를 보니 수긍할만하다. 


가파른 경사에서도 완만한 지형이 나타나고 벤치도 설치되어 쉬어갈 수 있는데 이 쉼터를 기점으로 왼쪽으로 가면 의왕 용갱이골이고 직진하면 국사봉이 나온다. 의왕시 용갱이골은 한문으로는 용광곡(龍光谷)인데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청계사 인근 골짜기에서 한 스님이 독경을 하자 바위에서 혹이 나왔다. 그 혹이 터지면서 용으로 변하더니 광채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용이 올라간 골짜기를 용광이 골로 했다. 나중에 발음이 바뀌어 용갱이골로 변했다. 여기 능선을 기준으로 용갱이골 반대쪽은 성남시 운중동이다. 국사봉 남쪽 산부를 차지한다. 국사봉과 운중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운중천이 가운데 흐르고 있다. 국사봉을 넘어 이수봉 능선까지 동쪽의 산부는 금토동이다. 금이 나오던 고개 밑이라 하여 금현동, 혹은 군대가 머물던 곳이라 하여 둔토리 등의 여러 가지 지명으로 전해지다가 금현동에서 ‘금’ 자를 취하고 둔토리에서 ‘토’를 취하여 금토동으로 지었다. 

청계산은 이름 그대로 맑은 계곡물이 골짜기마다 흐르고 있다.

스스로 개라 칭하며 나라를 생각했던 조견과 국사봉


바위를 붙잡고 암벽 타듯이 기어올라 소나무 밑동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겨우 올라와 국사봉 고지에 오르니 동서남북 사방이 확 트여 기어오른 수고로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가슴이 다 시원해졌다. 남동쪽 성남 방면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데 반해 북서쪽은 의왕 과천 너머 서울까지 멀리 조망되었다. 산 아래 둘러싸여 있다가 산을 넘어선 기쁨은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한다. 국사봉 표지석은 화강석 기단 위에 커다란 바위가 올려 있는 모습이었다. 자태가 늠름했다. 굵고 진한 정자체로 ‘국사봉’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에 오른 국사봉. 잔설이 녹지 않는다.


여름날 오른 국사봉은 푸른 소나무가 시원하다.


가을철 국사봉 또한 산아래 단풍 든 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국사봉(國思峯)은 글자 그대로 나라를 생각하는 봉우리란 뜻으로 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 조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윤은 나중에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는데 이는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국사봉에서 숨어 살며 고려의 멸망을 슬퍼한 그는 국사봉과 망경대를 오가며 봉우리에 앉아서 망국의 비탄에 잠겼다.  

국사봉에서 내려다본 우리나라 산하 

조견은 고려의 다른 충신과 함께 청계산에서 거문고와 퉁소를 가까이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고려가요 중 청산별곡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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