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내 인생의 한 부분이기에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만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깊고 두터운 만남, 둘째는 창조적이고 건설적 만남, 셋째는 밝고 행복한 만남이다. 그 반대는 얕고 옅은 만남, 퇴영적이고 파괴적 만남, 어둡고 불행한 만남이다.』
이 말은 『시스템과 시스템적 사고』(이명환 지음, 21세기북스)에서 지은이가 말한 만남의 세 가지 갈래다. 어떤 만남이 더 좋고, 어떤 만남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좋은 만남과 나쁜 만남으로 나눌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고 나쁨의 판단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깊고 두터운 만남에 대한 좋은 예는 관중과 포숙의 사귐을 의미하는 관포지교다. 관중은 포숙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 뒤 관중이 한 말이 더 유명해졌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삼국지에서 관우도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유비와 관우도 깊고 두터운 만남이다.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만남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의 만남이라 생각한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신이라 부르는 구글의 창립자들이다. 이보다 더 창조적 만남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밝고 행복한 만남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는 만남도 있고, 봉사하시는 분들이 홀로 사시는 노인들을 찾아가 돌보는 만남이 그렇다.
우리는 동네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아마 대부분 얕고 옅은 만남일 것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얕고 옅은 만남을 깊고 두터운 만남으로 가져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는 어른이 되어서 서로의 처지에 크게 상관없이 친구로 남는가 싶기도 하다. 서로 이해관계가 없을 때 이루어진 만남이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만난 범죄자끼리는 파괴적 만남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교도소 갔다 오면 새로운 인간이 돼서 나온다기보다 오히려 범죄를 더 배우고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그런데 너무도 바쁜 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관계를 맺는 건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만남을 함부로 대한다는 건 내 인생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군가와 만남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 친구들 얼굴을 보며 그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어떤 날은 회식하느라 밤 9시, 10시까지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는 내 동료들. 어찌 보면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좋은 만남으로 갈지, 나쁜 만남으로 갈지는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