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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Sep 04. 2020

우리 아이를 지키는 위대한 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코로나 감옥 생활한 지 6개월째다.

2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한 코로나로 인한 집콕 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이 되어간다.

우리 아이들과 외출도 안 하고 학교 가고 직장 갈 때만 빼고 집에서 생활한 지 6개월이 지나 7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특히 조심했던 것은 "나 하나라도 조심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엄마로서 나라도 모범을 보이는 것이 우리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한테도 "조금만 참으면 금방 지나갈 거야."라고 다니던 학원도 안 다니게 하고 집에서 하던 학습지 수업도 잠시 쉬고, 밖에 나가 쇼핑도 안 하고, 외식도 안 하고, 영화관도 안 가고, 여행도 안 가고,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신천지 교인으로 인한 대구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이겨내는 걸 응원했고, 이제 점점 줄어드는 확진자 수에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생각하며 집콕 생활을 이어갔다.


그동안 바빠서 못했던 아이들과 요리도 만들어 먹고, 화분도 키우고, 반려견과 산책도 즐기고, 무엇보다 나를 지탱해준 건 책 읽기였다.

나도 모르게 지쳐가는 영혼에 단비와 같은 건 독서였다.  

그중 요즘 읽었던 책 중에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 보자면,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수많은 제자를 남겼다. 다산의 학식이 얼마나 높았는지 전국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본인이 잘못하면 식구들도 같이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다산의 두 아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다산은 아들에게 청운의 뜻을 꺽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무슨 의미일까? 다산은 아들에게 과거 공부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는걸 다행이라고 했다. 글을 알면서도 과거 공부로 인해 폐단이 생기는 것보다는 근본을 세우고 학문에 뜻을 두는걸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했다.(출처:퇴근길 인문학 수업)

사람은 현실에 굴복하기 쉽다. 대의명분을 따르기 위해 현실에 무릎 끓지 않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유배생활 16년 만에 다산의 아들은 아버지의 긴 유배생활을 끝내기 위해 다산을 궁지로 몬 장본인들인 홍의호, 강준흠, 이기정에게 편지를 써서 유배를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다산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단다. "강준흠과 이기정에게 애 결하는 것은 3등급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4등급으로 떨어지게 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다산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이 쓴 여러 저서 중 "흠흠신서"는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던 백성들에 가했던 형벌에 대한 판례를 새로이 정리해서 제공함으로써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심지어 죽기도 하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다산의 애민정신이 깃들여있는 책이다.

과연 나는 다산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본인이 벌을 받아 유배를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3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장장 18년간의 유배생활을 견뎌야 하는 본인보다는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우리는 6개월이고 7개월이 지나고 있다. 지금의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내가 원한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나만 지킨다고 종식되는 게 아니다.

"나 하나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광화문에 수만의 사람이 시위를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고, 놀이동산에 놀러가고,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난 어떤 종파를 비난하거나 지지하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무분별한 어른들 때문에 6개월 동안 조심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했던  집에만 있었던 어린아이가 학교 갔다 오는 잠깐의 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할머니한테서 할아버지한테서 아저씨한테서 아주머니한테서 코로나가 감염이 되는 것이다.

이건 누구 하나만 실천하다고 절대 종식되는 게 아니다.

자기만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스크도 쓰지 않고 검사도 받지 않는 어른들 때문에 왜 아이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우리 동네에서는 그동안 코로나 확진자가 생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동네에 있는 공부방 선생님이 확진이 됐다. 그리고 같이 사는 가족이 확진이 됐고,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가 확진이 됐다. 

확진자인  학생이 다녔던 교회, 학원, 소모임 등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연관이 됐고 동선을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다 보니 결국에는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 전체 학생, 임직원이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되었다. 

집에만 머물던 아이는 전체 학생들을 학교에 같이 모아놓고, 몇 시간 만에 모든 검사를 진행한 어른들로

 인하여 한여름 땡볕에서 1시간이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검사를 받아야 했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검사하다가 오히려 전염될까 무섭다고 항의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본인 아이의 일이 된다면, 본인 손자 손녀의 일이 돼도 그렇게 마스크도 안 쓰고 맘대로 살 수 있을까?

이제 코로나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매일 보는 이웃의 일이고 나의 일인 것이다.

나만의 코로나 감옥에서 이제 나오고 싶다. 심신이 너무 지쳐간다. 그나마 책으로 위안을 받고 있지만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너무 기운이 빠진다.


우리 아이들한테 마스크 쓰지 않고 외출하는 즐거움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

코로나 전 우리가 아무렿지 않게 누렸던 삶의 즐거움을 우리 아이들한테 돌려주고 싶다.

다산 정약용처럼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절제하고 조심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함으로써 우리 아이를 지키는 위대한 일은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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