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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Feb 13. 2023

멀어져 가는 너를 보며...

아들이 나갔다.

그래, 나도 안다.

아이들이 크면 독립해야 하는 것을...

머리는 이해하는데 마음은 더없이 쓸쓸하다.

그것도 너무나 즐겁게 나가는 모습은 더욱더 나를 쓸쓸하게 한다.

오늘 아들이 집을 나갔다.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아들! 방은 항상 거지꼴이고 자기가 먹은 간식통도 버리지 않는 게으름뱅이~

그런 아들이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다 독립을 하던데, 한국의 아이들은 캥거루족이 돼서 다 커서도 부모와 같이 산다고 개탄한다. 그래, 나도 다른 사람 얘기일 때는 공감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나간다니까, 자꾸만 붙잡고 싶다. 


집에서 나가면 모두가 돈인데.... '숨만 쉬어도 낼 돈이 생기는 게 나가서 사는 삶일 텐데...'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집에서 나간다고 한 거는 대학을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이제 3학년 2학기가 되니,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자기는 참을 만큼 참았다!'라고 얘기하는 아이를 차마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집에서 도저히 갈 수 없는 지방 대학을 갔으면 진작에 독립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다니는 대학은 집에서 다니면 조금 고생스럽지만 다닐만한 거리에 있다.(물론 이건 부모의 입장일지 모른다. 본인의 생각은 다르겠지!)

그래서 조금 힘들더라도 집에서 다니라고 한 것이다.


아이의 아빠는 지금도 계속 반대이다. 금전적인 지원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들은 집에서는 도저히 힘들어서 못 다닌다고 선언을 했다. 아무리 반대해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자신은 나가겠다고 독립을 선언했다.


중간에 낀 나는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이 났다.

아빠의 연봉이 높은 아이들이, 좋고 연봉이 높은 곳에 취직한다는 기사말이다.

이제 취업준비와 학업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인데,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되면 학점도, 좋은 직장도 멀리멀리 사라지는 것이다.


두 사람의 다툼을 계속 지켜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가 고집을 꺾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조건 안된다고 하면서 '나가면 개고생이다.'라고 얘기하면 아들이 이해하지 못할게 뻔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기간을 6개월을 줄 테니, 6개월치의 월세와 보증금은 엄마가 대주는데 생활비는 대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학교 성적이 4.0이 넘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오기로 말이다. 그리고 생활비는 본인이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걸 부모가 해주면 아이는 진정한 독립도 아닐뿐더러, 독립하겠다는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라고 했다.

집 나가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부모의 도움 없이 현실에 부딪치고 생활비를 버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20대는 고단했다.

우리 부모님은 딸인 나에게  대학을 가지말고, 고등학교만 나와 직업을 가져서 집안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다. 고등학교도 상업게 고등학교를 가라고 하셨었다. 중3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 담임선생님이 인문계고등학교를 보내라고 하지 않고 그리고 '내가 상업계 고등학교는 절대 안 간다!'라고 버티지 않았으면, 고등학교만 나와서 직장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여성의 인권을 여전히 허접하게 취급됐으며, 형편이 어려운 집 딸들의 희생은 당연시되었다.

나는 그래도 나의 힘으로 대학을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반대해도 불구하고 대학에 붙은 나는 첫 번째 등록금만 내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당시 직장을 다니던 큰언니가 나의 첫 번째 등록금을 대줬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언니도 생활비를 보태면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을 다니던 나의 20대는 고달팠다. 어떻게 하든지 장학금을 받으려고 수업과 아르바이트가 없을 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중에는 학교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방학 때는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남들은 캠퍼스의 낭만을 논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도서관을 다녔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서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고된 날들이었다.

20대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은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고 싶었다.

20대에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아들이 느끼고 즐기면서 살기를 바란다.


너무 고단하면 미래를 꿈꾸기가 어렵다.

현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바쁘니까 말이다.


혹시 아들이 엄마하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다시 집으로 들어오더라도 6개월의 경험이 앞으로 아들의 인생에 값진 영양분이 되기를 빈다. 물론 6개월이 너무 좋아서 더 이상 집에는 못 들어온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아들, 네가 뱉은 말은 책임을 지리라, 믿는다.'


신나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자니, 서운함이 밀려오지만...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나의 20대도 집이 답답했으니까 말이야!


빛나는 너의 20대를 엄마가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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