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受容) - 나무

by 이광

나는 글을 읽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진솔하게 썼다면 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어느 정도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글에서 읽히는 것이 수많은 조각 중 단지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가끔 정체성이 다소 모호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지금까지 써온 글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자칫 잃어버릴 뻔했던 방향을 되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있어 나의 지난 글들은 북극성과도 같다. 그래서 가끔 글을 쓰면서 길을 잃게 되더라도 북극성을 볼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금세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게 된다.

예전에 썼던 글 중에서 나무나 돌멩이에 감정을 이입하여 쓴 글이 몇 편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쓸 때의 나 자신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글에서 내가 나무나 돌멩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내가 나무나 돌멩이에 나의 어떤 면을 투영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언젠가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가 문득 뇌리에 꽂히는 문장이 있었다. 다름 아닌 김용택 시인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라는 문장이다. 그날 집 앞 작은 동산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비추면 솔잎은 마치 전율하듯 빛나고, 까치나 참새들이 날아들어 머물다가 또 다른 데로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나무에서 수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는 햇빛, 바람, 비, 눈, 새를 비롯해 자신에게 깃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아주 담담해 보이는 나무의 모습 너머에 뭔가를 초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무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나 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된다.’


이 문장에서 ‘–된다 ‘는 객관적 서술이다. 하지만 ’-되지요 ‘라고 바꾸면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그래서 다음의 문장들을 적어보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고,

비가 오면 비에 젖은 나무가 되고.

눈이 오면 눈 쌓인 나무가 되지요.

그러다가 새가 날아들면 새가 깃든 나무가 되는 거지요.


나는 이 문장들을 수첩에 적어두고 아침 기도할 때 나만의 기도문을 읊조리듯 읽는다. 그러면 오늘을 보다 수용적인 자세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언젠가 산행을 하다가 뿌리가 드러난 소나무를 보고 가던 길을 멈췄던 적이 있다. 문득 소나무도 어딘가로 옮겨가고 싶은 마음이 왜 들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는 소나무가 어딘가로 옮겨가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뿌리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때의 내 생각과 말과 행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뿌리를 들어낸 소나무



스치는 향기만으로 잊고 있던 사람을

밤새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소나무는 포도주를 마시며

이국적인 외모의 포도나무를 그리워했다

소나무는 숙취의 고통으로

뿌리까지 흔들리는 그리움을 잊기 위해

온몸에 붉은 포도주의 흔적을 남기며

벌컥벌컥 마셨을 것이다


술김에라도 그리움이 향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땅에서 뿌리를 들어내며 안간힘을 쓰는 소나무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에게

그리움을 전하고 싶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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