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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a Apr 27. 2022

봄비

  자정이 넘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하루 종일 켜져 있던 컴퓨터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의자에 걸터앉았다. 눈이 건조하다 못해 시린 느낌이 들어 눈을 지그시 감아 보았다. 이젠 괜찮으려나? 살며시 눈을 뜨고 건너편 컴퓨터 모니터 하단에 점멸하는 파란 불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처럼 눈이 시리지는 않지만 종일 눈을 혹사한 것 같아서 가슴 한 편으로는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컴퓨터 전원 코드를 뽑자 모니터 아래 파란 불빛도 사라졌다. 이제 그만 누우려고 침대 머리맡에 앉았는데 바로 옆 탁자 위에 읽다 만 소설집이 눈에 들어왔다. 단편소설을 엮어 놓은 소설집에 내 마음이 동해서 재미있게 읽고 있는 터였다. 침대에 눕는 것을 유예하고 책을 들어 책갈피가 꽂혀있는 책장을 펼쳤다. 책갈피. 그것은 요전 날 도서관 사서로부터 받은 책갈피였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보통 책 세 권을 고른다. 소설 한 권, 산문 한 권, 시집 한 권. 내가 장르별로 세 권을 고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내 삶이 한 군데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살면 살수록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한쪽으로 치우치다 보면 삶이 윤활하지 못해서 늘 삐걱댈 수밖에 없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세 개의 장르를 읽음으로써 이상과 현실을 적절하게 조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라는 대로 꼭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의미를 준다. 


  여느 날처럼 세 권의 책을 골라 사서에게 도서관 카드와 함께 건네자 사서는 카드와 책을 하나씩 스캔하고 반납해야 할 날짜를 알려주며 돌려주었다. 책과 카드를 받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사서의 책상에 놓인 투박한 책갈피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적당히 두꺼운 재생용지를 자르고 윗부분에 펀치로 구멍을 내어 두 가지 색종이를 돌돌 말아 만든 끈을 묶어 놓은 책갈피였다. 소박하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책갈피에 시선을 두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사서가 말을 건넸다. “제가 만든 건데 필요하시면 드릴까요?” 나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고 그럼 고맙게 잘 쓰겠노라고 말했다. 사서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갈피 다섯 개중에서 세 개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이렇게 투박한 책갈피가 좋더라’고 말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사서가 "그럼 이 책갈피도 한 번 써 보세요",라고 말하며 다른 책갈피를 건넸다. 도서관 이름이 인쇄된 하트 모양의 책갈피였다. 그것은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책갈피라고 한다. 사서는 두 개를 건네면서 다음에도 필요하면 또 이야기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오다가 따뜻한 봄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는 계단참에 잠시 서서 손에 든 책갈피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했다. 


  소설집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서른다섯 페이지로 구성된 단편을 금세 읽고 말았다.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뿌듯한 기분으로 불을 끄고 침대에 막 누우려는 데 창밖에서 섬광이 연달아 번뜩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보니 제법 굵은 빗방울 소리가 어둠 속을 파동치고 있었다. 요즘에는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아서 오늘 비 온다는 소식 또한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은 빗줄기를 가늠해볼 심산으로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손바닥에 부딪혀 사위로 튀겨 나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빗방울이 내 살갗에 닿는 촉감을 느껴보았다. 그러자 손바닥에 연달아 떨어지는 빗방울이 핏줄을 타고 심장을 향해 한 뼘씩 전진해 오는 듯하더니 일순간에 심장을 돌아 이내 발끝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 봄비는 나무뿌리까지 적시기에 충분할 것 같다. 비가 그치면 더욱 풍성한 연초록 잎사귀를 가진 나무의 자태에 나는 새삼 흐뭇해하겠지. 그러다 깔끔히 다듬어진 언덕에 또다시 초록의 풀들이 무성해지고 그러다 여름이 오고 나무 그늘 사이로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를 원 없이 듣겠지. 그렇다면 이 비는 봄을 희석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봐야 하는가. 점점 봄기운은 옅어지겠지. 희미해지겠지, 그러다 사라지겠지. 왠지 모를 아쉬움이 저 어둠 속에 진주해 있는 것 같아 갑자기 가슴에서 뭉근한 열감이 느껴진다. 이윽고 나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열감을 끌어안고 한동안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가 그쳤는지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 창밖은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늘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굵어지는 빗줄기로 봐서는 오늘 안에 그칠 비가 아닌 듯하다.






*제가 쓰는 책갈피입니다.


-제가 종이를 잘라서 붓펜으로 책 제목을 써 놓은 책갈피

-캘리그래피 작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제 영문 이름이 쓰인 책갈피

-교류하는 시인이 보내 준 책갈피

-도서관 사서가 건네준 책갈피

-싱가포르에서 구입한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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