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콘서트 당일 정오 재하는 구례역에서 김달을 태우고 거북이 펜션으로 향한다.
“진보라 씨랑 사진도 찍었어요?”
김달이 재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은 안 찍고 책에 사인은 해드렸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진보라 씨가 작가님 팬이라니, 처음 그 소리 듣고 입이 안 다물어지더라니까요. 혹시 진보라 씨가 웹소설은 안 좋아하시나 몰라요.”
“아,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볼게요.”
재하가 김달을 흘끔 보며 미소 짓는다.
“나도 빨리 책을 내든지 해야지, 안 되겠네요.”
“웹소설계의 거장 김달 작가님께서 지금 초야에 묻혀 사는 저를 부러워하시는 건가요?”
재하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보라 씨도 모르는데 거장은 무슨 거장이에요. 에휴.”
말끝에 서로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작가님 긴장되는 건 아니죠?”
재하가 심상하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티가 나요?”
김달이 신기하다는 듯이 재하를 바라봤다.
“보통 긴장 풀 때 작가님처럼 하거든요.”
“정말이요? 역시 심리 관련 베스트셀러 작가는 그냥 된 게 아니었네, 아니었어.”
“농담하고 나니까 긴장이 좀 풀리죠, 작가님?”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하네요. 작가님이랑 이야기하고 가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가는 내내 생각이 많았을 거예요.”
“아 참, 가족 여행은 어디로 가요, 작가님?”
“유럽이요.”
“유럽이면 기간이 좀 길겠는데요. 보름 아니면 이십 일?”
“한 달이요.”
“와, 그렇게나 오래요?”
재하는 김달을 흘끔 보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제로 여행은 열흘 남짓이고 나머지는 파리에 있으면서 작품 구상 좀 하게요.”
“그럼, 그동안 식구들은 뭐해요?”
“아, 아내랑 딸은 박물관 투어를 하겠다네요.”
“거긴 좀 위험할 텐데 둘만 다녀도 돼요?”
“아내 친구가 결혼해서 독일에 사는데, 같이 애들 데리고 다니자고 하나 봐요.”
“아, 그래서 유럽으로 가게 된 거구나. 잘됐네요.”
“가족끼리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아내랑 딸은 기대가 커요.”
“아빠랑 오랜만에 가는 여행인데 왜 안 그렇겠어요. 앞으로는 국내라도 가족 여행 자주 다니세요.”
“그럴 생각인데 작품 들어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뭐.”
김달이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작가님은 안 그럴 거예요. 세상에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게 없잖아요.”
“나중에 작가님은 결혼하면 식구들한테 잘할 것 같네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날이 언제나 올지 모르겠네요.”
“작가님, 선영 씨한테 마음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잘 해봐요.”
“그렇게 보였어요?”
재하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김달에게 물었다.
“그럼요. 선영 씨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눈빛이 남달랐달까. 나도 결혼 전에 아내를 만날 때는 저런 눈빛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래요? 작가님한테는 아니라고 못 하겠네요.”
“내가 봤을 때 두 사람은 보통 인연이 아니에요. 강물이 돌고 돌아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두 사람도 결국 만날 운명이었던 거죠. 안 그래요?”
“역시 작가님 웹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가 있었네요. 작가님은 독자가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아시네요.”
“아, 그래요? 하하하, 작가님한테 칭찬 들으니까 좋은데요. 아무튼 제가 유럽에서 돌아오면 작가님과 선영 씨 사이에 생긴 운명적인 서사를 듣게 되길 바랄게요.”
“재촉한다고 강물이 빨리 흘러가지는 않을걸요. 헤헤.”
“또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
재하는 이렇게라도 김달에게 선영에 대한 자기 마음을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준석과 슬기, 그리고 현정과 수창에 이어 자신과 선영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난 건 마음이 든든한 일이었다.
선영이 김달을 소개하자 관객들이 환호와 함께 큰 박수로 김달을 환영했다. 관객들은 웹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김달은 앞으로 나가 인사한 후 사람들을 죽 둘러봤다.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몰려왔다.
“여러분 눈빛을 보니까 제가 여기 잘못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잔뜩 기대하고 오신 것 같은데 제가 여러분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앞에 붙은 플래카드에 적힌 대로 저는 '웹소설의 세계'란 주제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부디 그중에 건지실 게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공상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저에게 머릿속으로 공상만 하지 말고 공상한 것을 그려도 보고 글로 적어도 보라고 스케치북을 사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스케치북에 생각했던 것을 그리기도 하도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제 취미가 되었고, 그 취미는 수면이 늘 부족했던 의대에 다닐 때도 저에게 유일한 오락이자 위안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때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주제가 있고 서사가 있는 소설로 발전해 있었죠. 그러다 취미 삼아 웹소설을 연재하게 됐는데 그게 운 좋게도 대박이 난 거예요. 그 계기로 의사를 그만두고 웹소설 작가로 먹고 산 지 올해로 7년이 되었습니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는 표정이었다.
“만약 공상을 좋아하는 저에게 부모님이 너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공상만 한다면서 야단을 치셨다면 아마 저는 판타지 소설을 쓰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공부가 최우선이라는 기존의 획일적인 인식이나 가르침은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세상에 쓸데없는 일이란 없으며 인생은 모를 일의 연속이란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 관객들에게서 공감의 박수가 나왔다.
김달은 이어서 자신이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고 글을 연재할 때 어떻게 마감에 맞춰 쓰는지에 관해서 소개했다. 그러면서 모든 일에는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라며 소설을 연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어떤 일이 정말 좋다면 그 일에서 파생되는 어려움까지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장점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단점까지도 감수하고 즐길 수 있겠는지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에도 관객들은 다시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웹소설 작가가 되는 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김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대화의 시간이었는데 서로 먼저 질문하려고 손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아무리 웹소설이 좋다지만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직업인 의사를 어떻게 그만둘 수 있었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는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일지는 몰라도 김달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따로 있었고 그 일이 바로 웹소설이라고 답했다.
다음은 7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연재하면서 슬럼프가 없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김달은 사실 슬럼프 때문에 거북이 펜션에 오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매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의가 생기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대화의 시간이 끝나고 김달은 “여기에 오는데 어느 작가님이 그러더군요. 세상에서 가족만큼 소중한 건 없다고요. 저도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해드리고 싶네요. 아무리 일과 명예와 돈이 좋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과 바꾸지는 말라고요.”라는 말로 자기에게 할당된 시간을 마무리했다.
모두가 진심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들려준 김달에게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재하와 선영도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때 김달이 재하를 보고 드디어 끝난 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재하가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다음은 선영의 소개로 이환의 오카리나 연주가 있었다. 역시 모두가 그의 연주를 흥미로워했다. 이환의 연주에 이어 준석의 기타 연주가 있었고 곧이어 미자가 시를 낭송할 순서가 되었다. 연주를 마친 준석은 미자가 시를 낭송하는 동안 배경 음을 연주하기 위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미자가 시를 낭송하기 전 감정을 잡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미자가 준석에게 눈짓하자 준석이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잔잔한 기타 음이 교실을 가득 채울 때쯤 미자가 낭송을 시작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내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오고 잠시 후 미자는 두 번째 시를 낭송했다.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미자의 단아한 목소리로 듣는 윤동주의 시는 듣는 이의 마음에 더욱 그리움을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의 표정에서 시에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미자가 준비한 마지막 시 낭송이 이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미자의 맑은 목소리와 잔잔한 기타 음이 잘 어울려져 모두의 마음에 가을을 수놓은 멋진 시 낭송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도 시 낭송의 여운 때문에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관객들도 여럿 있었다. 가을에 아주 잘 어울리는 코너였다.
김달은 펜션 식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콘서트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주된 화제는 미자의 시 낭송이었다. 준석은 미자가 낭송하기 전에 감정을 잡기 위해 눈을 감던 모습이 압권이었다며 직접 눈을 감는 흉내를 내 모두를 웃게 했다. 김달은 식사 후에도 선영과 재하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저녁 늦게 재하의 차를 타고 구례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