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에는 드디어 도서 출판 거북이에서 낸 첫 책이 나왔다. 책의 저자 이해솔은 한 중견 건설사 경리과장으로 이번이 그녀의 두 번째 책이다. 삼십 대 후반에 결혼한 해솔은 아이를 빨리 갖고 싶었다. 그러나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던 터라 임신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마흔이 된 저자는 더 이상 임신을 미룰 수가 없어서 직장 상사들과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임신해서도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해솔이 느꼈던 점을 쓴 『임신해서도 직장에 다니고 싶어요』가 그녀의 첫 책이었다. 이번 책은 그녀가 쌍둥이를 출산한 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현재 0.7인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스웨덴처럼 육아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책 제목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쌍둥이 육아를 잘 해낼 수 있을까요』이다.
선영이 손끝으로 책 표지에 인쇄된 출판사 이름 ‘도서 출판 거북이’를 매만졌다. 그 순간 가슴속 뜨거운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와 두 눈을 촉촉하게 했다. 어제 인쇄소에서 책을 받아본 해솔도 책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선영에게 전화했다. 선영도 그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선영은 책 홍보 관련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에 가야 했다. 이를 안 재하가 선영을 자기 차로 구례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미리 나와 기다렸다.
“그냥 택시 불러 타고 가면 되는데 괜히 저 때문에 재하 씨가 피곤하겠네요.”
선영이 재하의 차에 오르며 말했다.
“선영 씨도 참, 제 차로 가면 되는데 뭐 하러 이 아침에 택시를 불러요?”
“저야 고마운데, 재하 씨가 피곤할까 봐 그렇죠.”
“조금도 안 피곤해요. 또 제가 이래야 마음이 편해요.”
“아무튼 고마워요. 서울에 갔다 오면 곧장 재하 씨 책 출판 작업 들어갈게요.”
“급한 것 아니니까 천천히 해요.”
“그게 아니라 제가 재하 씨 원고를 빨리 읽어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 들으니까 은근히 긴장되는데요.”
“재하 씨도 참, 저는 재하 씨와 한 팀이라는 것만 잊지 마세요.”
“물론이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요.”
“알았어요. 재하 씨가 있으니까 서울에 가도 마음이 편하네요.”
“서울에 있는 동안 여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럴게요. 아 참, 사무실 책상에 진보라 씨에게 보낼 책을 포장해 놓고 그냥 와버렸어요.”
“제가 나중에 택배 보낼 때 같이 보낼게요. ……생각해 보면 진보라 씨를 알게 된 게 참 신기해요.”
“그게 다 책 때문이에요. 진보라 씨는 이런 시골에 책방이 있는 게 신기해서 둘러보러 온 거니까요. 사실 저랑 재하 씨도 책 때문에 알게 된 거잖아요.”
“그렇네요. 우리도 책 때문에 만났었죠. 그러고 보니 책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네요.”
“재하 씨 말이 맞아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거북이 콘서트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와 음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뿐만 아니라 어떤 이에게는 기쁨을,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어떤 이에게는 위로를 선물로 주고 있으니까요.”
“선영 씨 말을 들으니까 저도 콘서트 때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좀 더 신경 써야겠는데요.”
“재하 씨는 지금까지 강연 나가서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재하 씨가 들려주는 행복 이야기를 들으면 느끼는 바가 클 거예요.”
“하하, 그럴까요?”
“그럼요. 저만 믿어봐요, 재하 씨.”
“그럼, 선영 씨만 믿겠습니다. 하하하.”
선영은 서울에 간 지 3일 만에 거북이 펜션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부터 재하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보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선영이 보내준 책을 받아 앞부분을 읽고 있는데 공감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또한 선영이 낸 첫 책이라 더욱 애정을 느낀다고도 했다. 선영은 그렇게 말해준 보라가 무척 고마웠다.
출산을 보름 남짓 앞둔 슬기도 책을 읽으며 자신도 도시에서 살았다면 똑같이 겪었을 일이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책 사진과 그날 읽은 부분의 소감을 올렸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책의 저자인 해솔이 슬기에게 디엠을 보냈다. 공감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해솔은 슬기가 올린 글과 사진을 통해 슬기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고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잘 키우기를 기도하겠다고 했다. 슬기는 자신이 선영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음에 펜션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자 해솔은 더욱 반갑고 고맙다며 쌍둥이가 좀 더 크면 펜션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쌍둥이들이 썼던 욕조 같은 유아용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슬기는 연신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며칠 후 해솔이 보낸 커다란 택배 상자에는 갓난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펜션 식구들은 택배 상자 속 물품을 보면서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선영은 “또 이렇게 책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네요.” 하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재하를 바라봤다. 재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선영의 말에 공감했다.
책은 출간 일주일 만에 베스트셀러로 부상했다. 출산율이 역대 최저치인 현실에서 책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 여성 정치인은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고 한 시민단체 관계자도 출산율 문제를 다루면서 이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거기에 영화배우 진보라도 책 사진과 함께 무척 공감되는 이야기라는 글을 올렸다. 이런 영향으로 책은 거듭 추가 인쇄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선영은 책이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어느 정도 인기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성과가 클 줄은 몰랐다. 저자도 추가 인쇄 소식을 듣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 어리둥절할 뿐이라며 놀라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정과 수창도 선영에게 전화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외에도 출판계 지인들의 축하 전화가 이어졌다. 그중에 주호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전화도 있었다. 선영을 잘 따르는 직원으로 선영이 퇴사한 후 편집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아이고, 축하합니다, 팀장님. 팀장님은 어디에 가시든지 일을 내실 줄 알았다니까요. 거기에 제가 일할 자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곧장 달려가겠습니다.”라며 넉살 좋게 웃었다.
“출판사가 워낙 작아서 책상을 더 들여놓을 자리는 없고 정원 관리할 사람은 필요하니까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선영은 서울에 처자식이 있는 그가 그저 농담으로 건넨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며칠 있으면 퇴직금이 입금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퇴직금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말했다. 선영이 출판사를 떠나고 주호 부모가 투자한 부동산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 여파가 출판사에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주호는 퇴직금을 빨리 보내주지 못해 괴로워했고 최근에야 돈을 마련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주호가 자신의 오피스텔을 처분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출판사 직원들은 선영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했다. 선영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통화를 끝냈다.
선영은 주호와 자신이 차린 출판사 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출판사를 나오면서 ‘그래, 나 없이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자신을 두고 여직원과 바람을 피운 주호에 대한 일시적 배신감 때문이었지 진심은 아니었다. 선영은 자신이 공들여 키운 출판사가 비록 자신이 없더라도 계속해서 굳건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퇴직금을 위해 자기 오피스텔까지 처분했다는 주호에게 고맙다는 전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직 그렇게 편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옛 동료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며칠 후 들었던 대로 통장에 퇴직금이 들어왔다.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선영은 전화를 걸까 했지만, 결국 전화 대신 문자로 퇴직금을 잘 받았고 앞으로 출판사가 승승장구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주호는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다는 답신을 보냈다. 선영은 따로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주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