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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35화 네 번째 거북이 콘서트

 콘서트 일주일 전 공지가 나간 뒤 이틀 만에 100명의 신청이 완료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자체 공무원이었다. 공지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자체 문화‧체육‧관광부 담당자가 선영에게 전화했다. 이번 콘서트에 참석하고 싶은 공무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자체 공무원 중 많은 수가 펜션 유튜브 채널 구독자였던 터라 거북이 콘서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야기 손님이 같은 지역에 사는 베스트셀러 작가 신재하라는 걸 알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문제는 그들의 가족들까지 하면 수가 이백 명은 족히 넘는다는 것이다. 

 선영은 펜션 식구들과 의논 끝에 이번 콘서트는 신청자가 가족과 동반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인원이 늘어난 만큼 안내 요원이 필요했다. 선영은 이전에 담당자가 행사 도우미에 대해 말했던 것이 생각나 담당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담당자는 참가 인원이 배로 늘어난 만큼 콘서트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지자체 공무원들이 행사 안내와 안전 문제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선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원 통제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번 거북이 콘서트는 장소와 인원수 말고도 내용 면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이야기 손님과의 대화가 끝나고 악기 연주와 시 낭송에 지자체 공무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악기 연주는 바이올린 연주 한 명과 오보에 연주 한 명이 추가되었고, 시 낭송은 지자체 문학 동아리 회원 세 사람이 각자 한 편의 시를 낭송하게 되었다.


 거북이 콘서트가 열리기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한 행사 안내 요원 중에는 지자체장도 있었다. 그는 굵은 글씨로 ‘안내’라고 적힌 노란 어깨띠를 두르고 정문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 미자와 선영이 지자체장에게 가서 거북이 콘서트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서 고맙다고 하자, 그는 거북이 콘서트가 지역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오히려 자기가 고맙다고 했다. 

 단상에 플래카드를 매다는 일도 안내 요원들이 맡아서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이크와 스피커도 지자체에서 가져와 설치했다. 야외에서 콘서트를 하더라도 100명 정도는 음향 장비 없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펜션에서는 따로 마이크와 스피커를 준비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담당자가 얼마나 거북이 콘서트에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콘서트 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안내 요원이 맡았다. 촬영을 담당한 재하가 오늘 이야기 손님이라고 하자, 안내 요원 중 한 사람이 촬영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 선영은 쉬는 날 안내 요원으로 차출되어 마지못해 온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펜션에 나타난 안내 요원들은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고 콘서트에 참여하고 있는 걸 즐기고 있었다. 선영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북이 콘서트가 마치 지역 축제처럼 여겨졌다.      


 선영이 사회를 보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단상에 오르자, 잔디밭에 줄줄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 순간 선영은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실내에서 듣던 박수 소리와는 전혀 다른 무게의 박수 소리였다. 박수 소리만 들어도 200이라는 숫자의 위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선영은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입을 열었다.

 “책과 이야기와 음악이 있는 거북이 콘서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거북이 콘서트 프로그램 운영자 강선영입니다.”

 선영이 자신을 소개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문에서 안내를 마친 지자체장도 어느새 운동장 뒤쪽에 서서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거북이 콘서트는 북스테이 손님들과 옹기종기 앉아서 기타 연주를 들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자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을 모시고 콘서트를 열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콘서트는 저희에게도 의미가 큽니다. 콘서트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벌써 많은 인연이 생겼어요. 지금 여기에 오신 분들도 그렇고 이전에 다녀가신 분들도 저희에게는 모두 소중한 인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는 건 정말 멋지고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멋지고 근사한 일에 안내 요원으로 참여하고 계시는 지자체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네 번째 거북이 콘서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박수가 운동장을 채웠다.

 “플래카드에 적힌 대로 오늘의 이야기는 ‘심리학을 알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저 책을 읽어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때 여기저기에서 손을 들었다.

 “와, 책을 읽으신 분들이 이 자리에도 계시네요. 오늘 이야기 손님으로 모신 작가님의 첫 책은 『가끔은 불안해도 씩씩하게 살고 있습니다』이고 『심리학을 알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는 작가님의 두 번째 책입니다. 모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입니다. 더구나 작가님은 이 지역 출신이고 현재 이 지역에 살고 계셔서 이 자리가 더욱 뜻깊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들려주는 행복 이야기에 여러분도 많이 공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이야기 손님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신재하 작가님을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박수갈채를 받으며 단상으로 올라온 재하가 선영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선영이 귀에 대고 “재하 씨, 파이팅!”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재하는 “고마워요, 선영 씨.”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마이크를 잡은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그 긴장감마저 즐기자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재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관객들을 둘러보며 가벼운 인사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잔디밭에 앉아 있는 여러분의 모습이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즐겁고 여유로워 보인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라,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 근사한 일을 하는 여러분은 더욱 근사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자, 관객들은 옆에 앉은 사람들과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중에는 옆에 있는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단상에서 그 모습을 보는 재하의 마음도 흐뭇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고요함의 지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꽃 한 송이가 발하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자연이 내게 주는 선물이고, 그로 인해 생겨나 두루 퍼지는 나의 맑은 마음은 내가 자연에게 주는 선물이다.’ 저는 이 말이 좋아서 산책할 때마다 읊조리곤 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여러분이 옆에 있는 분들과 따뜻한 미소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문득 이렇게 바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이 발하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당신이 내게 주는 선물이고, 그로 인해 생겨나 두루 퍼지는 나의 맑은 마음은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재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재하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에는 정신과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동안 심리학을 공부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 중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중 하나는 ‘행복은 태도의 문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분 좋게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옷이 흠뻑 젖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에 옷이 젖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비가 내리고 안 내리고는 우리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로 화를 내는 건 우리 스스로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 권한 밖의 일,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로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비가 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비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니까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 시간을 유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겪은 힘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는 지금 우리의 권한 밖의 일입니다. 이미 지난 일이죠.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받아들여야지 과거만 들여다보면서 괴로워하는 건 자칫 지금의 행복마저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과거는 나를 스쳐 지나간 비바람과 같습니다. 이미 지나간 비바람 때문에 지금 부는 선선한 바람을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문’을 곰곰이 음미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제게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다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박수 소리가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재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훑었다. 그들은 재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거나 더욱 크게 박수를 쳤다. 

 “나머지 하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줄일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루에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중 대부분은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드는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줄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부정적인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스스로 묻고 나는 지금 무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라고, 대답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더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집에 돌아가셔서 하루 중 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려는 시도를 해보세요. 명상도 좋고 운동이나 청소도 좋습니다.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해 보세요. 그러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매일 감정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날의 내 자신의 감정 상태를 글로 적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찰하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다 보면 행복한 날도 더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재하의 이야기가 끝나자, 관객들의 열정적인 박수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재하에게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부터 글을 썼고, 어떻게 작가가 되었고,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재하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고 좋은 책들을 꾸준히 읽고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 준 사람은 바로 선영이라고 대답했다. 관객들은 작가가 된 사연을 듣고 모두 놀라워하면서 선영에게 박수를 보냈다. 선영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재하의 얼굴을 보고 금세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여 관객들의 박수에 답했다.      


 재하의 시간이 끝나고 이환이 오카리나를 연주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오카리나를 연주하기 전에 이환은 선영의 요청에 따라 발차기를 비롯한 태권도 품세를 시범 보였다. 관객들이 키가 큰 이환의 절도 있고 깔끔한 동작에 환호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안내 요원 중 몇몇은 이환을 따라 발차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90도도 채 올라가지 않는 자신들의 발을 보고 아쉬워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이환의 발차기 시범 덕분에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아졌다. 이어진 이환의 오카리나 연주도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에는 준석이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연주했다. 가을에 어울리는 곡을 찾다가 미자가 준석에게 추천한 곡이었다. 준석은 사람들이 노래를 모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기타 연주가 시작되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어서 미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불렀다. 이 곡 역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미자의 고운 목소리에 푹 빠져 몸을 좌우로 흔들며 감상하기에 바빴다. 1절이 끝나고 미자가 관객들에게 2절은 같이 부르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어우러져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젖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다음은 공무원 지원자 두 명이 나와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연주했다. 둘 다 취미로 악기를 연주한다고 했지만, 동료들과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그녀들이 연주한 곡은 모두 세 곡이었다. 각자 한 곡씩 연주하고 마지막 곡은 함께 연주했다. 세 곡 모두 귀에 익숙한 곡으로 관객들은 리듬을 타며 흥겨워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이어지는 시 낭송도 그에 못지않았다. 먼저 미자가 준석의 잔잔한 기타 음에 맞춰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과 윤동주의 ‘소년’을 낭송했다. 미자의 청아한 목소리도 일품이었지만 미자가 마치 독백 연기를 하듯이 감정을 잡으며 자아낸 분위기는 시 낭송의 백미였다. 

 미자가 단상에서 내려가고 이어서 지자체 문학 동아리 회원들의 시 낭송 차례였다. 먼저 단상에 올라온 사람은 삼십 대 중반의 K였다. 얼마 전에 직장 동료와 결혼한 K는 선영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자마자 맨 앞줄 한가운데에 있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이를 본 관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K의 아내는 관객들의 반응이 쑥스러웠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손을 흔들며 남편을 응원했다. 잠시 뒤 웃음소리가 멎고 중저음의 K의 시 낭송이 시작되었다.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빙하착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다음은 오십 대 여성 J가 단상에 올랐다. 후덕한 외모의 그녀는 소프라노처럼 목소리의 음이 높고 고왔다. 그녀는 시 낭송을 하기 전에 함께 온 남편과 대학생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뒷줄에 있던 남편과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J는 이 멋진 곳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더욱 즐겁고 행복하다고 해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대숲 아래서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마지막 시 낭송은 삼십 대 여성 S였다. 그녀는 한 문예지의 시 공모에서 상을 받아 등단해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시인이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공무원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살고 있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한다는 김남조의 ‘편지’를 낭송했다.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콘서트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관객들은 책방에 들러 책과 굿즈를 사기도 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사서 마시기도 했다. 펜션 식구들은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손님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몸이 무거운 슬기도 시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손님들을 대했다. 

 콘서트 후 가장 늦게까지 손님들을 응대한 사람은 재하였다. 손님들이 재하의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기 때문이다. 미리 책을 준비해 온 사람도 있었고, 거북이 책방에서 책을 구입한 사람도 있었다. 재하도 자기가 쓴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 서 있는 긴 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책을 쌓아 놓고 사인을 하거나 강연을 가서 열댓 명에게 사인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긴 줄은 처음이었다. 재하는 너무 고마워 자신에게 책을 내미는 모든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며 책에 정성을 다해 사인했다. 


 그날 모든 손님이 돌아가고 펜션 식구들은 콘서트를 잘 끝냈다는 흥분 때문에 그냥 있을 수 없다며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집에 갔다가 파티 소식을 들은 이환도 금세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합류했다. 식탁은 지난번처럼 주문한 음식으로 차려졌다. 미자는 콘서트 하느라 모두 애썼다며 음식이 모자라면 얼마든지 주문할 테니 마음껏 즐기라고 했다. 식구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오늘 콘서트에서 재미있었거나 인상적이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선영이 오늘 콘서트 전후로 나간 책이 무려 일흔 권이 넘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는 재하의 책이라고 해 모두가 놀랐다. 모두 재하를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보면서 박수를 쳤다. 선영이 소감 한마디 하라고 하자, 재하는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기다리던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꿈인가 했다며 아직도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선영은 자기가 했던 말처럼 네 번째 콘서트는 재하뿐 아니라 모두에게 두고두고 즐거움을 주는 이야깃거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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