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오다 공황장애 판정을 받고 비로소 기쁘고 행복했어요. 곧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제대로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최근 어느 방송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감독 최종태 씨의 말이다. 그는 2006년 ‘플라이 대디'로 데뷔해서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팬데믹으로 영화계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2020년에는 ‘저 산 너머’, 2021년에는 ‘사제로부터 온 편지’를 개봉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 전에 심한 공황장애를 겪었다. 공황장애라는 것을 모른 채 종합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이상이 없다는 통보만 받았다. 자신은 곧 죽을 것만 같은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픈 데가 없다는 소리만 하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더욱 불안했다고 한다. 그러다 절박한 심정으로 두드린 정신과에서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그때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장은 쪼여 들고 가슴은 차가운 전류가 흐르듯 얼얼하다. 왼손은 마비가 되는 듯 점점 굳어가기 시작하고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러다 심장마비가 와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것이 내가 겪었던 공황장애 증상이다. 이런 증상은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불면증, 우울, 불안 등의 영향으로 공황장애가 나타난다.
예전 회사에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우수사원들을 뽑아 해외 연수를 시켜줬다. 저명한 미국의 교수진으로부터 교육도 받고 여행도 할 수 있어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고 가고 싶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실적을 기준으로 뽑는 거라서 한 해 동안 수고한 보람도 찾을 수 있어서 스스로도 자랑스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나는 6년 연속으로 우수사원으로 뽑혀 해외연수에 참여했다. 연수는 항상 참가자 대표의 프레젠테이션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사내 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사내뿐만 아니라 외부 강좌에서도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외연수에서도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어서 프레젠테이션 역시 영어로 진행해야 했다. 회사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그런 기회를 즐겼다. 그런데 세 번째 연수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온몸이 마비되는 것처럼 굳어갔다. 입도 얼어붙어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호텔 연회장에서 진행되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에 휩싸여 화장실로 뛰어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굳어가는 손을 주무르고 입을 풀었다. 문제는 심장이었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일이라 스스로도 몹시 당황스러웠고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멘탈이 붕괴된 상태, 소위 멘붕상태였다. 차가운 물을 마시면서 굳어지는 몸을 풀기 위해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했다. 드디어 잔뜩 굳어진 상태에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웃으면서 시작 멘트를 했겠지만, 극도로 긴장한 상태라서 그렇지도 못하고 얼굴이 굳어진 상태에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더욱 큰 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 발음이 꼬여서 단어를 다시 발음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5분 정도 지나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한 일이라 굉장히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영화감독 최종태 씨처럼 나도 연수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원을 찾아 각종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는 역시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꺼림칙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런 증상이 계속 나타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다음 해에 다시 해외 연수를 가게 되었을 때 그 증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 지난해 연수에서의 난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타기 전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수 기간 내내 극도로 긴장된 상태로 있다가 가까스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완전 파김치가 되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부터 때때로 강의하기 전에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 처음 5분을 잘 견디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진행했다. 그런 식으로 별 탈 없이 살아가다가 한 번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이 있었는데 불면증과 함께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 정신과에 문을 두드렸고 상담과 함께 수면제와 안정제를 복용하게 되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의도적으로 산책을 했고 동시에 지난 삶을 돌아보며 마음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약도 복용하지 않게 되었다.
돌아보면 힘든 시간이었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내 삶에서 소중하고 긍정적인 시간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실체가 없는 단지 막연한 두려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내가 그 순간을 잘 이겨내고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거뜬하게 이겨내고 있다. 내가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런 증상이 나타나도 절대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중요성이다. 피하거나 숨어버리면 실체 없는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서 내 몸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굴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당히 맞서서 그 순간을 견디다 보면 점차 두려움은 보통의 긴장 정도로 바뀌게 된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다 보면 자신감이 두려움을 몰아낸다고 믿는다.
불면증, 우울, 공황장애는 나에게 독서와 글쓰기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가치관도 바꿔주었다. 그러면서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또한 어떻게 해야 나답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시집을 출간하고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공황장애 덕분이라고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SNS에서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일부러 그 사람들의 피드를 찾아가 응원하는 댓글을 남긴다. 공황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만큼 그 정도로 삶이 녹록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위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든다. 어느 날 불안장애가 나에게 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보다 의미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작가의 글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라는 문장을 읽고 ‘너무 오랫동안 가슴 뛰는 삶을 살아서 이젠 덤덤하게 살렵니다.’라고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