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로 대지가 얼어붙은 날 문득 숲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육신을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어도 묵은 생각들이라도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한 해 동안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생각의 파편들을 한 번쯤은 털어내야 한다. 올해는 숲 속을 거닐며 문내 나는 파편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옷을 위아래 이중으로 껴입고 장갑을 끼고 숲으로 향했다. 나는 나름 경건한 의식을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입구에 일렬로 서 있는 산불조심이라고 쓰인 깃발들이 찬바람에 거세게 퍼덕거렸다. 바람이 매서워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언덕길을 올랐다. 그러다 뒤를 보고 걸었다. 등 뒤로 쉼 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그렇게 푹신할 수 없었다. 몸을 약간 바람에 기대어 걷는 것도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언덕을 올라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나 있는 산책로로 접어들자 바람은 겨울 숲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임무를 다했다는 듯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겨울 숲에서 바람은 불지 않는다. 다만 나무와 나무, 덤불과 덤불 사이를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온종일 소곤거릴 뿐이다. 겨울 숲에는 이름 모를 새와 바람만이 깨어있었다. 새들의 지저귐과 숲 여기저기에서 소곤대는 바람이 없다면 겨울 숲은 삭막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 가장자리에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저 높이 연륜이 묻어나는 나뭇가지를 스쳐 내리는 햇빛으로 동백잎은 마치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동백나무는 나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음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겨울 숲을 걷는 젊은 연인을 보았다. 젊은 연인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숲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주머니 속에서 두 손을 맞잡은 연인은 따뜻한 온기와 사랑으로 걷는 내내 황홀하리라. 언젠가 새해 첫날 동해의 어느 해변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내 코트 속에 꼭 안고 일출을 기다리며 서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참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비록 나와 그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지라도 그 순간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중년 부부도 겨울 숲을 걸었다. 중년 부부는 손을 잡지 않았다. 각자 나름 추위를 견뎌낼 두툼한 복장으로 겨울 숲을 걸었다. 그들은 굳이 가슴과 가슴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겨울 숲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이 그러한 것처럼. 인생에서 평탄한 길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길지 않은 평탄한 길을 걸었던 추억으로 수많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다. 오르막이 힘들고 내리막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땅만 보고 한 걸음씩 내딛는 오르막길보다 약간에 성취감에 도취되어 초점이 흐려진 내리막길이 더 힘들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낭패를 본다. 다행인 것은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간간이 평탄한 길이 나타나 숨 돌릴 틈을 준다는 것이다.
겨울 숲을 걸으면서 한 해를 돌아보았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늘 후회가 쌓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과거와 마주하는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또 다른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웃지 못했던 날들이 떠오를 때 가슴이 얼얼하고 척추가 시큰거렸다. 다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무리 삶이 버겁더라도 지금 이 순간 웃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