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지 않은 기억들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몇 번인가를 왔어도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경치를 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낯섦이 주는 긴장감을 즐기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난 여행에서 남겨놓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는 것일까? 아니다.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고, 그중 몇 가지일 수도 있고, 이들 모두 아닌 다른 까닭이 있을 수도 있다. 여행을 다만 어떤 것 하나로 규정한다면 굳이 그것을 하려고 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몇 번인가를 갔던 곳을 다시 찾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곳이 주는 설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여행했던 곳을 짚어보면 남달리 마음이 설레고 다시 가고 싶어 지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도 이런 여행지가 몇 곳은 있다. 이번이 네 번째인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이 그중 하나다(지난 글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 참조).
주변이 온통 붉은 바위 투성이인 공원의 주변 지역은 특히 해가 질 무렵이면 마치 들불이 인 듯 활활 타오른다. 공원 어느 곳을 가든 이맘때쯤이면 아무리 허름해 보이는 경치라도 보기 드문 절경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빛깔이 붉은 까닭만 가지고 이처럼 멋진 장면을 연출해 내는 자연의 은밀한 힘이 놀랍기만 하다. 이런 풍경도 햇빛이 쨍쨍한 한낮에 보면 황톳빛이 바란 것처럼 생기를 잃어 좀 덜 예쁘기는 하지만,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낮이라고 해서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좀 달라 보일 뿐, 본래 가지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는가는 전적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몸가짐으로 사는지, 재미있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따위에 따라서 사물은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따져보면 진지한 관심의 방향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몸은 같은 길 위에 서서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수 있다.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는 전적으로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풍경에 대하여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이 나와는 다른 관점과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강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야트막한 개울이다. 프리몬트 강(Fremont River)은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얕은 개울이기는 하지만, 물이 흐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니 처음엔 선뜻 강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강바닥이 어떨지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한발 들어서니, 이미 많은 차들이 다닌 탓인지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강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저 아래로 방금 건너온 강줄기가 보이고, 그 뒤로 펼쳐져 있는 첩첩산중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다 졌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강줄기가 흐르는 주변에는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그 밖의 지역은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깝다.
이곳의 지형은 다른 곳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눈을 돌려 사방을 살피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한쪽으로는 높이 솟은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높고 평평한 메사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그 한옆으로는 긴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뷰트가 듬성듬성 서 있고, 그들 틈새로 그들과는 또 다른 빛깔과 모양을 지닌 지형이 자리 잡고 있다.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했다. 길은 차츰 험해지고, 인적은 둘째 치고, 지나다니는 차 한 대 보이질 않는다. 이 길은 '하트넷 로드(Hartnet Road)'로 '대성당 계곡 길(Cathedral Valley Road)'의 반대쪽 입구에 해당하는 길이다.
지난 글에서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을 제대로 보려면 이 길을 섭렵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길, 반대편 입구(대성당 계곡 길)에서 시작해 절반쯤에서 산길에 들어섰다가 진흙에 빠져 사투를 벌였던 바로 그 길이다. 그때와는 무기가 다르니 걱정할 것 없이 당당하게 들어서서 '다 덤벼!'하는 자신감으로 천천히 탐험을 시작했다.
그러나 탐험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땅은 드넓어 끝이 어딘지 내다보이질 않고, 저 멀리 둘러선 산들이 이곳이 분지 지형임을 알게 해 준다. 끊임없이 길을 달리노라면 뒷거울에 비치는 뽀얀 먼지와 저 밑으로부터 전해지는 묵직한 흔들림이 이 길이 비포장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가까이에 눈에 띄는 지형이 사라진 드넓은 황무지에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이런 땅에 길을 낸 까닭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었다.
물론 이곳에도 터를 잡고 살아가는 생물들이 있다. 키를 낮추고 잎을 줄여 몸속 물을 최대한 보존하는 쪽으로 진화해왔을 덤불들이 가장 눈에 띄는 식물이다. 그 밖에 다른 생물들은 없는 것 같이 거칠기만 하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거친 땅에도 또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사막 생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눈에 띄는 것만이 주목받는 인간 세상과는 또 다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저 멀리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얼핏 보기에는 울타리 같기도 하고, 무슨 짐승 무리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는 않다. 다소 겁을 먹고 천천히 다가가자 드러난 정체는 다름 아닌 검은 소떼였다. 귀에 식별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방목하는 것 같은데, 주변에 먹이가 될만한 풀이나 덤불 따위가 많지 않은 데도 방목을 하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 뒤로 길은 온통 소똥으로 뒤덮여 똥밭을 지르밟고 가야만 했다는...
지루하던 길은 차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곧게 뻗은 길이 활처럼 휘는 모퉁이를 돌면서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병풍처럼 드리웠던 산들이 갑자기 눈앞으로 훅 들어온 느낌이다. 산세는 물론이려니와 땅과 바위도 알록달록 저마다 다른 빛깔을 하고 있어 눈앞이 훤해진 듯했다. 짐작컨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길이 품고 있는 숨은 경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막 언덕을 오르려는데 차를 가지고도 몇 시간씩 걸리는 곳을, 무엇보다도 인적조차 드문 곳을 자전거로 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 황량하고 먼 거리를 달랑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밝고 씩씩한 청년이다. 진정한 모험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엔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그 먼 길을 하루길로는 어려울 텐데 별다른 장비도 없이 어찌하려는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지 확인해 보지만, 아무리 천천히 가도 자동차인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언덕배기 꼭대기쯤에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Lower South Desert Overlook
황량하고 지루한 길을 한 시간 여 달리다 보면 등장하는 전망대가 있다(Lower South Desert Overlook). 유타 남서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황토 지형이 널찍한 분지 위에 펼쳐져있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의 다른 지역과 비슷하면서도 온통 황토 일색인 방문자 안내소 인근의 풍경과는 빛깔부터 좀 달라 보인다. 드넓은 평지를 달리다 느닷없이 펼쳐지는 이런 풍경과 마주할 때면 자연에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Upper South Desert Overlook
'아!'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는 것 말고 달리 할 말이 없다. 로우어 전망대와 연결되는 것 같은데, 로우어가 서론이라면 이곳은(Upper South Desert Overlook) 본론에 해당하는 듯 보인다.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닥은 자세하게 보면 모래가 아니다. 빗물이 흐른 자국이 있고, 듬성듬성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저 평온해 보이는 곳도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그곳은 또 그 나름대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있다.
무엇을 하든지 느낌에 따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느낌이란 때때로 스스로를 속여 사실을 달리 느끼게 하거나,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전적으로 느낌에 기대는 일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느낌에 따르되 지나치지는 말아야겠다.
Cathedral Valley Overlook
'내려다 보기'는 사물의 윤곽을 잡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한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때때로 내려다 보기를 하는 것도 좋겠다. 비뚤어지지 않고 길을 가려면 높이 오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높이 오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자기만의 시각, 눈높이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횔동들은 어쨌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아집이 될 만한 것들도 자신만의 독특함 때문에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Cathedral Valley
드디어 도착했다. 지난해 오월에 다녀간 뒤 일 년 반이 걸렸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의 놀람과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밟아보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 기대와 흥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인지 하늘이 잔뜩 흐린데도 주변은 온통 밝게 빛났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은 이제 단골 여행지가 됐다. 이번이 네 번째니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 둘러보지 못했으니, 앞으로 몇 번은 더 와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다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은 공원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주로 주말여행만 하는 방식에도 탓이 있다. 한 번 와서 토요일 하루밖에 활용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며칠을 머물며 하는 여행과는 달리 제한된 곳 밖에는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오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조금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그 당시에 느꼈던 그 감동적인 장면들이 이번에는 감동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던가, 기억하기로 어떤 풍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엉뚱하게도 아주 다른 경치가 있다는 따위의 문제가 있다. 여행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같은 장소에 여러 번을 가도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개인이 경험한 몇 번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굳이 결론 삼아 말하자면 '사람은 같은 경치를 두 번 볼 수 없으며, 그러므로 같은 곳에 몇 번을 가도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Sunset of Cathedral
긴 산 그림자를 드리우며 기우는 햇살은 오늘도 마법사가 되어 여기저기 온 산과 들, 나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는 말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시간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