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미 Dec 12. 2022

그 애가 첫눈을 봤으면 좋겠어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며. 취리히도 금요일에 첫눈이 왔어. 내리는 눈이 정원의 나무 위에 하얗게 쌓이는걸 잠시 보고 있었어.


학생이었을 때, 눈이 흔치 않은 곳에서 온 남자 애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어. 밤사이 첫눈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던 어느 새벽,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어. 눈을 좋아하던 그 애가 마침 고향에 내려가 있다는 게 떠올랐어. 그 애에게 서울의 첫눈을 보여주고 싶단 생각에 롱 패딩을 대충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나왔어.


나는 그 애의 자취방 방향으로 걸었어. 그 애가 자주 가던 고깃집과 선술집, 그리고 그의 자취방 앞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어. 깜빡하고 장갑을 끼지 않고 나오는 바람에 핸드폰을 쥔 손에선 점점 감각이 없어졌지만 골목을 여러 번 오가며 영상을 찍고 다시 찍었어.


맘에 드는 영상을 건지고 나서야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핫초코로 손을 녹였어. 찍은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자 그 애가 금방 읽었어. 그는 어김없이 기뻐했고, 나는 마침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에 찍은 것뿐이라고,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어.


한참 카톡을 주고받다 집에 돌아오니 눈은 그쳐있었지만, 창밖에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어. 그때 살던 반지하 원룸의 하나뿐인 창문 앞엔 늘 자전거가 대져 있곤 했는데, 그날은 그 꼴 보기 싫은 자전거마저도 하얀 눈에 덮여 예뻐 보였어.


이번 주에도 내리는 첫눈을 카메라에 담았어. 잠옷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가, 짧은 영상과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어. 문득 그때의 그 애에게 올해의 첫눈도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눈이 온다고 연락하기엔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가 있는 곳에도 첫눈이 왔을까? 만약 아직이라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도 그에게 첫눈을 보여 주면 좋겠어.


2022.12.11 눈 쌓인 취리히에서 유미가.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곳, 프랑스 알자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