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로버트 먼치, 그림: 안토니 루이스 / 북뱅크
읽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 세상에는 “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 그렇게 거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반지르르한 두꺼운 표지 앞에는 여전히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늘 가족과 함께 사랑, 웃음 넘치는 시간이었음 좋겠습니다.
아이와 아빠가 함께하는 책이길 바랍니다.
선물로 책을 받은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우리 회사를 아껴주시는 부산의 한 선생님께서 일전에 나의 득녀 소식을 들으시고 마침 내가 그 학교의 강의차 들렸을 때 축하 메시지와 함께 직접 전달해주신 책이다. 상대방의 상황을 생각하며 고르셨을 시간과 정성, 고스란히 감동으로 전해졌다.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두어 번 읽었다. 한 페이지는 그림, 옆의 페이지에는 글이 있는 얇은 책이라 다 읽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 책이다
그 책을 최근 다시 읽었다. 선물 받은 당시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모가 된 것에 실감이 나지 않았나 보다. 정말 놀랍게도 처음 읽는 책처럼 다음 페이지의 내용은커녕 전체적인 전개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시 읽어보니 첫 장부터 강한 인상을 받는다. 아가의 얼굴에 우리 딸, 재인이가 보이는 것이다. 한참 동안 그림과 글에 시선을 반복하며 추억에 잠긴다. 속싸개로 아이의 몸을 반듯하게 에두르고 뿌듯해하는 아빠도 생각나고, 신생아의 이유모를 울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의 모습도 생각난다.
2페이지를 넘기니 아기가 두 살이 되었다. 서랍을 열어 뭐든 꺼내 집을 어지럽히는 지금의 재인이의 모습과 행동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에는 치우고 정리하느라 지친 아내의 모습도 함께 있다. 그림과 현실이 겹치니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온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이가 자란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엄마를 힘들게 하지만, 엄마는 변함없이 아이에게 자장가를 들려준다. 한없는 사랑을 준다.
그런데 참 간사하다. 육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신 선물은 감사한데, 만약 아빠와 딸의 이야기면 더 이입해서 읽을 수 있을 텐데 하며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책 속의 아이는 아들이고, 부모는 엄마만 나오기 때문이다. 감사한 마음에 지나친 욕심이 잠시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비로소 책의 페이지가 몇 장 안 남았을 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으로 이렇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도 처음이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초보 부모의 육아일기가 아니라 막 아버지가 된 이의 어린 시절부터의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내가 재인이에게 보내는 사랑’이 책의 주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보여주신 당신의 아들, 나에 대한 사랑’이 이 책의 줄거리였던 것이다.
어른이 되고 독립하는 아들을 보며 아쉬워하는 엄마, 점점 기운이 노쇠해져 자장가를 다 부르지 못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위해 다 자란 아들은 엄마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드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와 갓 태어난 딸을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책은 끝이 난다.
등장인물과 상황이 정말 한 치의 오차 없이 나에게 들어맞는다. 선생님은 정말 제대로 선물하셨다. 왜 처음에는 이런 충격을 못 느꼈을까. 아마도 그때보다 변화한 상황 속에 달라진 생각, 혹은 생겨난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서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밖에.
Bon Folds의 <Still fight it>라는 곡이 생각난다. "Good morning, son.(잘 잤니. 아들.)"이라는 안부로 시작하여 "You're so much like me. I'm sorry.(넌 나를 많이 닮았구나. 미안하다.)"라는 사과로 끝나는 아버지의 노래다. 잔잔한 멜로디와 일상적인 가사지만 노래의 감동은 아주 묵직하다.
책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와 비슷한 내러티브를 가졌기 때문에 이 노래가 불현듯 생각나지 않았을까. 아이를 통해 알게 되는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 그것에는 보람과 만족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버거운 책임으로 인한 무기력과 불안함, 그것이 파생하는 일종의 미안함까지도 포함한다는 것 말이다. 그러다 보니 존경과 감사라는 거대한 감정보다 부모님에 대한 연민이 더욱 피부로 와 닿는다. 책에서는 그것을 <자장가>로 표현하고, 이 노래는 인생에 대한 솔직한 <격려>로 전달한다.
최근 <슈퍼밴드>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느 밴드가 이 노래를 커버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원곡만큼이나 뛰어난 연주와 보컬 때문이겠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면서 심사평을 마무리했던 윤종신 님 때문에 더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도 역시 자신과 아이와의 관계의 그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자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형돈 님도 고혈압과 당뇨, 그리고 최근 뇌졸중까지 겪으신 어머니께 방송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께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혹시 지금의 안 좋은 상황들을 다 견디실 수 있다면, 또 저를 낳아주세요. 제가 잘 보필할게요."
부모가 되면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것인가 보다. 아직 부모 된 지 며칠 안된 치가 주제넘게 단정 지어본다. 글을 다쓰고 나니 어린 시절 자장가로 불러주시던 찬송가 후렴 가락이 생각나는 밤이다. 이 글은 육아에 대한 에세이 정도로 해둬야겠다.
<Still fight it> Ben Folds 뮤직비디오 링크: https://youtu.be/kqPwR39VMh0
<Still fight it> 수퍼밴드 커버&심사평 영상링크: https://youtu.be/TIlssB0IJv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