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당신 가거든(2)>
내가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꿈지럭거리고 있는데, 문이 사르륵 열리고 단정한 은미 씨가 밖으로 나왔다. 풀 부스러기는 다 털었나, 말끔했다. 그녀는 사극에서나 볼 법한 붉은 실로 묶은 연한 노란색 책을 들고 나왔다. 고무신 같은 단화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온 은미 씨는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르신은 눈을 반짝이며 일어서서 마주 인사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호은당의 백은미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젊은이가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어르신은 굉장히 깍듯할 정도로 은미 씨에게 정중했다.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할 거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했다.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은미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르신에게 자리를 권하고 마주 앉았다.
“안에서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꼭... 그리 하셔야만 하시겠습니까?”
“허허허. 이 노부의 유일한 소원이 그것입니다. 이 손으로 우리 할멈 보내주고, 이 손으로 우리 할멈 흔적을 정리하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우리 할멈은. 아직도 집 앞 마트도 혼자 못 간다오. 그런 할멈을 그 큰 삼도천을 어찌 혼자 건너게 하겠습니까? 겁도 많은데 제가 옆에서 손 꼭 잡아 주어야 합니다.”
“... 정우 씨, 대문을 걸어 주십시오.”
대문 건다고 소리가 밖으로 안 나가나.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커다란 대문의 빗장을 질러 걸었다. 은미 씨와 어르신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헛걸음을 했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일부러 문을 걸어 두신 거였군요.”
응? 그건 무슨 소리지? 알아들을 수는 있겠는데... 이해는 안 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은미 씨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뭐야, 뭔데! 또 사기 대상이었던 거야?! 무당이랑 또 짠 거였어? 와. 내 감동. 산산이 부서졌다. 아침에 손님 온다는 그 말이 이 어르신 이야기였던 거야? 우와. 진짜 치밀하다. 진짜 대단한 사기단이다.
“허허허. 아무나 갈 수 없는 약방이라더니. 아무 때나 와서는 안 되는 약방이었군요. 그래, 오늘은 문을 열어 반겨주셨다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 어르신이 원하는 약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지금 이건 뭐지? 나는 무슨 판타지 드라마 촬영 현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대본을 읽는 명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감님,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은미 씨는 들고 있던 책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르신은 허허 웃었다.
“그저 노부일 뿐입니다. 제 주제에 영감이라니요. 허허... 후회는 없습니다. 사실 지금껏 몇 번을 찾아오면서도... 문이 잠겨 헛걸음하면 안심이 되곤 했습니다. 조금은 더 살 수 있구나. 아직은 시간이 더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문이 열려 있었다면... 나는 당당하게 약을 지어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고민도 해 보았지요. 생각해보니... 만약 지난번에 왔을 때 문이 열려 있었더라면, 저는 약을 지어 달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헌데 오늘은 아닙니다. 오늘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 또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은미 씨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어르신의 까만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연분홍 입술이 살그머니 곡선을 그렸다. 조금은 굳어 있던 어르신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하지만 어르신은 이미 원하는 약을 손에 넣은 것처럼 기뻐 보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출 것 같았다. 죽는 약을 받으러 왔으면서 저리도 기뻐하다니.
나는 당장이라도 돌아가시라고 하고 싶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더 계실지는 모르지만, 남은 생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남은 날들 하루하루를 더욱 뜻깊고 아름답게 사시라고. 살아 계시는 동안 보답하고 갚으시라고. 죽어서 갚으면 뭐하냐고. 살아서 갚으시라고. 살아서 고운 옷 입혀 드리고 고운 신 신겨 드리고 맛있는 거 사 드리라고. 살아 계실 때 두 분이 같이 즐기시라고.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보내시라고.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다.
은미 씨는 들고 온 책을 펼쳤다. 빼곡한 표가 그려져 있었고, 칸칸마다 무언가가 쓰여 있었지만 내가 선 곳에서는 그 작은 글자들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것이 사기 칠 때 쓰는 비밀장부인 것 같았다. 나는 책의 모양을 자세히 봐 두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정우 씨, 미안하지만 따뜻한 생강차를 한 잔 타 주시겠습니까? 영감님의 체질에는 메밀이 맞지 않습니다. 갈증이 난다 하셔도 차가운 물보다는 미지근한 물이 더 좋습니다.”
엥? 척 보고 체질도 아나? 아니, 그것보다 그 비밀 장부를 들킬 것 같으니 날 내쫓는 거겠지. 나는 순순히 주방으로 쫓겨났다. 엄청난 증거를 잡을 수 있었는데! 앗, 그러고 보니 녹음하는 것을 깜빡했다. 이미 중요한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은데. 이번엔 그냥 두자. 왠지 녹음하기 싫었다.
나는 정해진 잔을 꺼내 생강차를 탔다.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맛을 보았다. 매콤하고 톡 쏘는 향기 속에 달큼한 맛이 숨어 있었다. 조심조심 찻잔을 들고나간 나는 드디어 장부 속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가 테이블로 갔을 때, 장부는 처음처럼 덮여 있었다. 젠장.
어르신은 향이 좋네요. 하며 호로록 생강차를 비웠다. 은미 씨는 어르신이 차를 다 드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의 시선은 바로 옆의 잔디밭에 핀 민들레에 닿아 있었다. 나 역시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나뭇잎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서글픈 이야기를 다 듣고도 너는 춤을 추냐. 아니, 내가 그렇게 보는 거지. 나는 그 슬픈 이야기를 들어 놓고도 저것이 춤으로 보였다. 어째서일까. 어르신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기 때문일까. 저 애절하고 깊은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약은 당일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르신이 빈 찻잔을 내려놓자, 은미 씨는 민들레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르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까만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살그머니 휘어진 저 연분홍 입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이런 식으로 사기를 쳐도 되는 걸까.
이건 아니잖아. 사람을 죽이는 약이라니. 자살하는 약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그걸 달라는 저 어르신이나 준다는 은미 씨나, 둘 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애초에 그런 약을 만들 수나 있어? 만들어도 돼? 그거 불법 아니야? 와. 미치겠네.
“그...”
답답한 마음에 입이 저절로 달싹거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온화한 얼굴을 한 은미 씨와 진심으로 기뻐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은 어르신. 두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의아하게 나를 보는 두 사람을 향해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왠지 지금 어르신의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어르신의 숭고한 선택을 두고 내가 뭐라고. 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허허허... 젊은이도 나이가 들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노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될 겁니다.”
어르신은 그저 허허 웃었다. 두 사람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충실한 노비로서의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들보다 앞서 걸어, 대문에 걸어 놓은 빗장을 끌렀다. 골목을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들려왔다.
“헌데 약값은 어찌 드리면 될는지요?”
“약값은 이미 받았습니다. 일전에 문 앞에 두고 가셨잖습니까.”
어르신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이채를 띠고 웃음을 지었다. 은미 씨 역시 다른 말없이 빙긋 웃었다. 정말 그것으로 되는 것이냐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은미 씨는 그저 웃기만 했다. 뭔데? 처음 와서 돈다발이라도 문 앞에 놓고 갔나? 금 두꺼비? 황금열쇠? 주식? 거액이 든 통장?
“다음 보름밤에는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멀리 나가지 마십시오.”
“... 그렇습니까. 다름 보름밤에... 비가 옵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살펴 가십시오.”
두 사람은 알쏭달쏭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도대체 다음 보름은 언제고,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건데? 어르신은 몇 번이나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 손을 꼭 잡고 메밀차와 생강차가 아주 맛있었다며, 솜씨가 좋다는 칭찬을 잔뜩 해주고 돌아섰다. 어르신의 손이 떨어지고 나자, 내 손 안에는 꼬깃꼬깃 접은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이, 어, 어르신!”
“받으십시오. 받으셔도 되는 겁니다.”
은미 씨는 뒤쫓아 달려가려는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길지 않은 골목 끝까지 가는 동안, 어르신은 몇 번이나 돌아보며 인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은미 씨는 어르신이 골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르신이 돌아볼 때마다 꾸벅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윽고 골목을 돌아 그림자까지 사라지고 나자 은미 씨는 허리를 세우고 들어갔다.
“아. 나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내 손 안의 오만 원짜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은미 씨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건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주시는 용돈이라 생각하시고 받으시면 됩니다. 다른 분은 몰라도, 저분이 주시는 것은 받아도 됩니다. 저는 아직 마무리가 덜 돼서... 혹시 안에서 제가 좀 시끄럽게 해도 들어오지 마시고 마당에 그냥 계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게요.”
어... 뭐, 예. 어딘가 짠한 팁이긴 하지만 용돈 받은 셈 하라니, 나는 기쁘게 받기로 했다. 은미 씨는 연한 노란색 책을 품에 꼭 안고 다시 안채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내 다시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근데 시끄럽게 할 일이 뭐 있담? 뭐 약장을 다 뒤지거나 그래야 하나.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돌아섰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동그랗게 남은 물 얼룩을 닦고, 빈 잔들을 씻고, 아까 어질러 두었던 찻장을 다시 정리하고. 부산하게 움직이며 정리했다. 다시 마당으로 나오니 대청에는 언제 내놓았는지, 약 지으면서 먹으라고 가져다주었던 간식 쟁반이 나와 있었다. 역시나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만 달그락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여튼 잘 먹는다니까.”
나는 픽 웃으며 쟁반을 들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녹색 접시 가운데 그려진 노란 애벌레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