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당신 가거든(E)>
“나 왔어!”
쾅! 대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등장만큼이나 요란한 사람이 들이닥쳤다. 오전에 보았던 그 사이비 무당 아가씨가 평온한 호은당에 들이닥친 시간은 정확히 저녁 일곱 시였다. 은미 씨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배고파 죽겠다고! 왜 이제 와!”
은미 씨는 여섯 시부터 배가 고프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여자, 배고프면 무섭더라. 축 늘어져서 얼마나 심술을 부리는지. 진땀을 다 뺐다.
어르신이 가고 난 뒤, 은미 씨는 짓던 약을 마무리한다며 틀어박히더니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며 밖으로 나왔다. 나는 무거운 기구들을 두 눈 꼭 감고 해골바가지 가득한 방으로 옮겨 두었고, 은미 씨는 힘들다며 대청에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방이 엉망일 거라 생각하고 깨끗이 빤 손걸레를 들고 들어갔지만, 예상 밖으로 깨끗했다. 미처 치우지 못 한 작은 마른 잎 부스러기 몇 개를 줍고 바닥을 대충 닦기만 했다. 음. 마무리 깨끗해서 좋네.
그녀가 약을 마무리할 때까지 나는 지겨운 책을 읽었다. 처음엔 지겨워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꽤 재미있었다. 각각의 차가 가지는 효능이나 부작용, 맞는 체질, 맛과 향, 수색 등이 세세하게 쓰여 있어서 읽는 동안 그 차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오분의 일도 채 읽지 못했지만 은미 씨는 가지고 가서 읽어도 된다며 흔쾌히 책을 빌려 주었다. 그것 말고도 상담실 내에 있는 책은 아무거나 봐도 된다고 했으나, 그 안에 있는 책들은 죄다 약초학 책이라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나는 책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장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붉은 실로 묶인 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누워 있던 은미 씨는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고, 나는 어두워지는 정원에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더는 어두워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은미 씨는 배가 고프다며 일어났다. 침침한 마당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비명을 한 번 지르고, 그녀는 마당에 있는 가로등과 곳곳에 세워진 조명을 켜는 법을 알려주었다. 불을 밝히자 다른 세상이 되었다. 와. 여기서 술 마시면 술맛 좋겠네.
이른 봄을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이 조명 주변으로 모여들고, 은미 씨는 배고프다는 말만 백 번쯤 반복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격적인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 그때, 선녀 무당이 들이닥쳤다. 와. 어서 오세요.
“미안, 미안. 말 안 듣는 손님이 있어서. 가자! 오는 길에 내가 자리 잡아두고 왔어!”
선녀라는 무당은 냉큼 방으로 들어가더니 은미 씨의 외투를 챙겨 나왔다.
“오빠! 뭐 해? 빨리 옷 갈아입어! 언니 배고프면 지인짜 악독해져! 서둘러야 해!”
어, 저도요? 배고팠는데 잘됐다. 아싸. 공짜 밥이다. 나는 후다닥 상담실로 들어가 거울 달린 서랍장의 아래 칸을 조심스레 열었다. 비쩍 마른 왕 개구리나 시커먼 전갈이라도 나올까 봐 잔뜩 움츠렸던 목이 펴졌다. 서랍 안에는 내 옷과 가방밖에 없었다. 나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낡은 가방을 멨다. 아. 씨씨티비 있댔는데. 아, 몰라.
개량한복은... 내일부터는 좀 민망해도 입고 다녀야지. 저 해골바가지 방에는 죽어도 못 들어가겠다. 개량한복과 앞치마를 둘둘 말아 들고 나오는데, 무당이 후다닥 오더니 옷가지를 받아 휙 던져버리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그 촌스러운 옷은 치워! 그걸 가지고 어딜 간다는 거야? 가자!”
이미 은미 씨는 시커먼 오라를 풍기며 시퍼런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굶주린 은미 씨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은미 씨의 차에 올랐다. 내가 뒷좌석 문을 열자 무당이 냉큼 올라탔다.
“난 앞에 안 타. 사고 나면 제일 먼저 죽거든.”
“재수 없는 소리.”
은미 씨는 콧방귀를 뀌며 운전석에 앉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보조석에 앉았다. 내가 벨트를 채우기도 전에 자동차는 부웅 하며 날았다.
와. 초보라는 거 진짜 뻥이다. 미친. 레이서도 이렇게는 운전 안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좁은 길을 얼마나 잘 빠져나가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 위로 지나가는 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내일부터는 밥 잘 챙겨야지. 간식도 잘 챙겨야지. 아무리 바빠도 사장님 굶기지는 말아야지. 나는 마음 깊이 다짐했다.
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어느 식당으로 들어섰다. 은미 씨는 차가 서기 무섭게 뛰어내렸다. 발렛 파킹을 위해 다가오는 주차요원에게 차키를 건네는 그 순간만 공손했다. 방긋 웃으며 키를 넘긴 그녀는 이내 도깨비 같은 얼굴로 후다닥 식당 안으로 달려갔다. 나는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엄청 괴롭히지?”
언제 온 것인지 무당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녁 약속하시면 일찍 일찍 오세요. 사람 피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 미안! 가자. 오빠 오늘 첫 출근이니까 내가 쏜다! 마음껏 먹어!”
무당은 킬킬 웃으며 내 팔을 끌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는 이글이글 불타는 은미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우리 자리로 보이는 구석의 방에는 음식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은미 씨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음식만 먹는 그녀를, 나와 무당은 그저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던 은미 씨는 이제 허기는 면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젓가락 들 생각도 없이 자기만 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안 것 같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미안해요.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약 만든다고 너무 힘들었어요.”
무당은 긴 한숨을 토해내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이내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육사시미 큰 거 하나 더 주시고요, 공깃밥 하나랑 모둠 구이 큰 거 하나랑 맥주 두 병 주세요. 그리고 죄송한데요, 밑반찬들도 좀 더 주세요.”
술? 설마. 퇴근인데 대리운전시키지는 않겠지. 잔은 두 개면 돼요. 하며 덧붙이는 말에 아. 깨달았다. 대리운전 내가 하는구나.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이미 접시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직원은 빈 접시들을 우르르 걷어 가 버렸다. 남은 거라곤 조금 남은 육회 무침과 약간의 기본 찬들 뿐이었다.
“언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오빠 오늘 첫날인데 먹으라는 말도 안 하고 지 혼자 다 처먹니? 뱃속에 거지 들었어? 겁나 잘 처먹는 거 아는데 오늘 같은 날은 내숭 좀 떨어라.”
와우. 이 언니도 입 참 걸출하네. 생긴 것과는 달리 굉장히 거친 말투에 내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은미 씨도 같이 발광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했다.
“오늘 약 만드는 날이라고 내가 그랬잖아. 미안해요, 정우 씨. 제가 배가 고프면 굉장히 예민해지는 편이라서... 허기도 지고 그래서 급하게 막 먹었어요. 미안해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은미 씨 잘 드시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무당은 깔깔 웃었다. 이내 상이 새것처럼 차려졌고, 먹음직스러운 육사시미 한 접시가 놓였다. 구이를 위한 숯불도 자리를 잡았다. 무당은 숟가락으로 맥주를 뻥 하고 따버리더니 잔에 콸콸 부어 내밀었다. 내가 마시라고요? 운전은? 내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무당은 내 앞에 잔을 탁 놓고 다른 잔에 술을 채웠다. 은미 씨에게는 물 컵이 놓였다.
“오빠 첫 출근이니까 회식하는 거야. 아, 나는 직원은 아니지만 좀 낄게. 내가 쏘는 거니까. 괜찮지?”
직원은 아니겠지만 한통속이잖아요. 사기꾼 세트. 은미 씨는 조금 전과는 달리 우아하게 젓가락을 들더니 육사시미 세 점을 한 번에 입에 집어넣었다. 와. 오늘 많이 깬다. 이미 여신님 이미지는 가루가 되어 날아갔지만, 그래도 단아하고 온화한 약사님 이미지는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푼수 떼기 여동생 같았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지.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노비 짓을 하지. 차라리 동생 돌본다 생각하고 일하자.
“얘는 아시다시피 무속인이고 연화선녀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네 살이고, 버릇이 좀 없는 편이지만 나쁜 애는 아니니까 정우 씨가 이해 좀 해 주세요.”
“어머머? 언니가 할 소리는 아닌데? 오빠, 저 언니는 백여시라고 배고프면 돌변하는 괴물 여우야. 배고프면 간 빼먹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키우는 동안 밥 잘 줘야 해.”
“야, 내가 짐승이니? 애완동물이야? 키우긴 뭘 키워!”
그래. 잘 키우겠습니다. 먹는 걸 보니... 댁들이 크은거 종종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곧이어 마블링 화려한 소고기 한 접시가 도착했다. 은미 씨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많이 드세요. 연화가 사는 거니까, 오늘 아주 탈탈 털어 보자구요.”
은미 씨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 컵을 들었다. 연화라는 무당 역시 맥주잔을 들었다. 무당이 술 마셔도 되나? 스님이 아니니까 상관없나? 나도 그녀들을 따라 잔을 들었다. 팅 하는 맑은 소리가 퍼지고 은미 씨가 방긋 웃었다.
“첫날부터 요란하고 못 볼 꼴 다 보여드렸으니, 내일부터는 가식 하나 없이 정말 편하게 대할게요. 정우 씨도 편하게 생각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오빠, 나는 연화! 우리 언니 잘 부탁해!”
“예. 호은당 새 노비 박정웁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뭐야! 노비래!”
그래. 뭐, 얘네가 사기꾼 집단이든 사이비 집단이든 무슨 상관이람.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오늘 보니, 갑질 아줌마 같은 사람 아니면 굉장히 양심적으로 장사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나쁜 사기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면 안 되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노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시원하게 맥주를 비우고 나니 와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연화선녀는 코맹맹이 소리까지 해 가며 내 입에 고기를 넣어 주려고 애썼지만 나는 끝까지 받아먹지 않았다. 왠지 저거 한 점 받아먹으면, 먹여준 값이라며 명품 백 사달라고 할 것 같았다. 은미 씨는 처음으로 거절당했다며 아예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맥주 몇 잔이 오가고 배도 든든해지니 나는 두 사람과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역시 술이 오고 가야 친해지기 쉽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하호호 수다를 떨다 보니 두 사람에 대해서 꽤 많이 알 수 있었다.
연화선녀는 신을 대물림 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서른이 넘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반드시 외동딸을 낳는다. 그리고 그 딸이 성인이 되면 신을 받는다고 했다. 괴상한 가업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내려오는 집안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막대한 부가 따라오니 딱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 그렇게 사기를 치는데 돈을 긁어모으겠지. 무당이 된 지 올해로 딱 5년째이고, 신을 처음 받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날이라고 했다. 억지를 부려 대학을 가긴 했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한 달도 다니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고 했다. 거기에 대해 아쉬움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남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호은당의 거물 손님들은 내가 다 보내주는 거야. 라며 콧대를 세웠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지만, 오전의 진상 아줌마처럼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연화선녀는 그런 손님들을 골라 호은당으로 보낸다. 그러면 은미 씨가 적당히 약을 지어 준다고 한다.
그러자 은미 씨는 버럭 화를 내며 부인했다. 그녀가 주는 약들은 가짜가 아니라고. 은미 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약을 지어준다고 했다. 약 값은 자신이 책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화선녀가 임의로 정해 대신 수금하고 수수료 명목으로 약간 뗀 뒤 준다는 것. 의외로 은미 씨는 약간... 호구인가. 재주는 은미 씨가 부리고 돈은 연화선녀가 벌었다. 결국 이 사기꾼 팀의 두목은 연화선녀였다. 참으로 대단한 사기단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결국은 나도 이 사기단에 한쪽 발을 걸치게 됐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