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이튿날, 출근하려고 나서는데 주인 할머니가 살그머니 나를 찾아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월세 내는 날이구나. 가는 길에 입금하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마트에서 잘릴 때 받은 보너스가 있어서 다음 달까지 월세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쌀쌀하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출근이 하고 싶어서 일찍 나섰는데, 할머니에게 붙들리면 시간을 얼마나 빼앗길지 모른다. 나는 바쁜 척하며 꾸벅 인사했다.
“총각, 재계약해야지. 만기 얼마 안 남았잖아.”
역시. 그랬군. 미안하지만 나는 재계약할 생각이 없는데 어쩌나. 다음 달까지는 이번에 받은 월급과 보너스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고, 호은당에서 받을 첫 달의 월급만 더 보탠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원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재계약은 안 해도 됩니다. 여기 옥탑방 비는 거 기다리시는 분 있다면서요? 그분이랑 계약 진행하세요. 저는 만기 되면 나갈게요.”
“아니, 그게... 더 있어도 된다고. 차비 정도는 빼 줄 테니까...”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슬그머니 내 팔을 쿡 찔렀다. 아하. 그러니까 월세가 아쉽다, 이거죠? 내가 이 집에서 2년 살면서 얼마나 서러웠는데. 재계약은 무슨. 절대 안 할 겁니다. 다른 집을 못 구한다 해도, 내가 고시원을 가는 한이 있어도, 재계약은 진짜, 절대로 안 할 겁니다.
“어이구! 제가 늦어서요! 지각하면 안 되잖아요. 그럼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시고,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지각인 척 후다닥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옥상에서 총각! 정호 총각! 하며 연신 불렀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 아니, 2년을 그 집 지붕에서 살았는데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모릅니까? 정호가 아니라 정우라고요.
후다닥 달려 옥상의 시야를 벗어난 나는 잠시 멈추어서 숨을 골랐다. 한 숨 돌리고 난 뒤 담배 하나를 빼물다가 멈칫했다. 이 시간에 나오는 것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다. 저 끝에 노란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택가다 보니 어린이집이다 유치원이다 등원하는 아이들이 골목마다 와글와글했다. 나는 다시 담배를 집어넣고 아이들이 없는 길을 골라 빠르게 걸어 내려갔다.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새 직장, 호은당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라, 나 삼십 분이나 일찍 왔는데. 대문을 들어서자 은미 씨가 보였다. 그녀는 어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며 바라보고 있었던 민들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생뚱맞네. 나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박노비 출근했습니다.”
물을 뿌리고 있던 은미 씨가 나를 보고 깔깔 웃었다. 노비라는 말이 그리도 재밌는가. 나는 빙긋 웃으며 갈아입어야 할 개량한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 옷은 사랑채에 있는데... 갖다 드릴게요.”
사랑채. 이름은 예쁘지만 현실은 끔찍한 해골바가지들의 방. 그렇다. 나는 또 그 방에서 덜덜 떨며 옷을 갈아입던지, 씨씨티비 깔린 안채 상담실에서 옷을 갈아입던지 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은미 씨가 해골바가지 방에서 곱게 개어진 내 옷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주방에서라도 갈아입으실래요?”
“예.”
나는 단칼에 대답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이 넓어서 다행이다. 나는 여기는 씨씨티비 없나 하며 둘러보다 한숨을 쉬었다. 여기도 있다. 하지만 한 대 뿐이었고 씨씨티비는 입구만을 비추는 방향이었다. 나는 최대한 안 보일 것 같은 구석으로 들어가 힘겹게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입고 다니는 쪽으로 해야 할 것 같았다. 낡은 가방과 내 옷을 들고 나오자, 은미 씨는 어제처럼 거울장 서랍에 넣어도 된다고 했다.
“은미 씨, 이거 입고 다녀도 됩니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뿌리개를 대청 아래로 집어넣었다.
“그거... 입고 다니실 수 있으세요?”
그래요. 당신도 아시는군요. 입고 다니기 힘든 옷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갈아입는 게 더 힘들거든요. 내가 나직이 한숨을 쉬자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만요.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호은당이에요.”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는 옷가지를 가져다 놓고 나왔다. 은미 씨는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여기 어울리는 신발은 아마도 고무신이나 짚신이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대청을 내려서는데 은미 씨가 고개를 들었다.
“의상점 사장님께 방문을 요청드렸어요. 카탈로그랑 샘플 몇 벌 가지고 오신댔으니까 골라보세요. 입고 다니실 수 있을 만한 것들로 가지고 오신대요.”
응? 진짜 옷 사주나? 아니, 내가 사야 하나? 이런 거 어제 보니까 비싸던데... 저고리만 십 만원씩 하던데.
“그냥 이거 입어도 되는데요.”
“아니에요. 어차피 약방 유니폼인 셈이니까 제가 이번에 예쁜 걸로 몇 벌 뽑아 드릴게요. 세탁도 하고 그러려면 여러 벌 필요하잖아요.”
오. 득템. 순간 기뻤지만 아니었다. 이건 여기서 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일도, 입을 수도 없는 옷이잖아. 뭐, 출퇴근할 때 옷이 신경 쓰이긴 했으니. 예쁜 거 만들어 주시면 입고 다니자. 혹시 알아? 한국 전통의 멋을 사랑하는 젊은이로 보일지. 아. 젊은이는 아닌가. 뭐, 아무튼. 이런 밤색, 고동색 옷은... 진짜 노비 같아서 싫다.
은미 씨는 싱긋 웃고는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아. 먹을 거 찾는구나.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를 뒤따라 들어간 나는 역시나 냉장고를 뒤지는 그녀를 끌어내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오늘 간식으로 먹으려고 샀다는 빵과 커피, 과일, 치즈를 차려놓으니 꽤 그럴 듯 한 브런치가 됐다. 은미 씨는 맛있게 먹으며 한참 동안 자신만의 세상에서 식사를 즐겼다. 나는 즐거워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대문을 나섰다.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문 나는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재떨이로 쓸 뭔가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골목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들어가자, 은미 씨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진작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어요. 사랑채 뒤쪽으로 돌아가시면 흡연 구역이 있어요. 원래는 전체가 금연인데, 연화 때문에 만들어 둔 곳이에요. 요즘은 약방에 잘 안 와서 관리를 안 했는데, 조금만 정리하시면 쓰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게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 주지! 나는 손에 든 담배꽁초를 이 집의 유일한 쓰레기통인 주방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멈추고 곧장 해골바가지 방 뒤로 돌아갔다. 사랑채와 담장 사이에 사람 두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꽤 넓은 공간이 빙 둘러 있었다. 다만 정리가 되지 않아 잡초도 많았고, 무엇보다 해골바가지 방 때문인지 음침했다. 사랑채로 딱 가려지는 공간에는 먼지와 빗물 얼룩이 남은 철제 의자 하나와 말라붙은 담배꽁초 몇 개가 든 녹슨 깡통이 있었다. 나는 깡통에 꽁초를 던져 넣고 사랑채를 돌아 나왔다.
“정리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오전에 특별히 할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손님 올 때까지 쉬시면 돼요. 저는 약재 손질을 할 거라서 계속 대청마루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시고 거기 마음대로 꾸미세요. 손님 오면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손님 오면 저 부르세요. 곧장 나올게요. 잡초만 좀 뽑으려고요.”
은미 씨는 입안 가득 빵을 물고 대청마루를 가리켰다.
“저 밑에 목장갑이랑 낫이랑 호미랑 그런 거 다 있어요.”
옛날 집이라 그런가. 그런 것도 있네. 나는 긴 앞치마를 벗어 대청에 툭 걸쳐두고 마루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침침한 마루 아래엔 뭔가가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보니 낫이었다.
그래. 내가 한 낫질 하지. 어두운 마루를 손으로 더듬어 흙 묻은 목장갑과 낫을 챙겨 사랑채 뒤로 들어갔다. 손님 오면 부르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그릇은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인 뒤 나는 그늘진 흡연구역으로 들어갔다. 풀벌레들이 푸르르 날아다녔다. 나는 장갑을 단단히 끼고 낫을 꽉 쥐었다.
“늬들, 다 뒤졌으.”
오랜만에 하는 낫질이다. 나는 신나게 풀을 베어냈다. 이 가게에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아서 왠지 설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