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믿음의 가운데에서(1)>
<에피소드 4-믿음의 가운데에서>
내가 잡초를 베고, 벤 풀을 쌓아두고, 재정비 한 흡연구역 기념 담배까지 태우고 나니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손님이 없나? 조용하네. 나는 풀물이 진득하게 든 낫과 장갑을 챙겨 사랑채를 돌아 나오다 기겁했다. 고작 다섯 개뿐인 자리는 손님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나는 낫을 대충 수돗가에서 씻어 벽에 세워 두고 주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은미 씨는 물을 끓이고 있었다. 언제 이만큼이나 온 거지? 난 왜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거야?!
“아니, 사장님! 손님 오면 부르라니까요!”
“사장님 아니고 은미요. 그리고 이 정도는 저 혼자도 해요.”
“아니, 그래도...”
“자요, 끝나셨으면 여기 다과 좀 담아주세요. 흑임자다식만 담으시면 돼요.”
은미 씨는 빙글빙글 웃으며 자그마한 접시를 건넸다. 영 찝찝하고 미안한 마음만 가득한 나는 재빨리 찬장을 열고 다식이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비닐로 곱게 싸인 다식은 스무 개 남짓했다. 작은 나뭇잎 모양 접시에 다식 네 개를 담고 나무 포크를 두 개 얹어 쟁반에 올려두자 은미 씨가 찻잔을 올렸다. 내가 들고 가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곧 의상점 사장님이 도착한다고 연락 오셨어요. 가게는 제가 볼 테니까 상담실에서 옷 골라 보세요.”
“아니, 그래도...”
“박노비, 말 안 들을 거예요?”
푸훕. 나는 박노비라는 말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은미 씨는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든 듯했다. 어제 회식 때도 박노비라며 놀리고 아침에도 박노비라 인사하니 깔깔 웃더니. 나는 설거지라도 해 두려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다행히 설거지 거리는 좀 있었다. 은미 씨는 골동품 쟁반을 들고나가고 나는 동그란 수세미에 세제를 꾹 눌러 짰다.
노비면 어떠랴. 월급도 좋고 노비 치고는 대우도 좋고. 내 공간도 생겼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릇들을 깨끗이 씻었다.
“정우 씨, 의상점 사장님 오셨어요.”
은미 씨는 오래된 쟁반을 가져다 놓고 나를 불렀다. 마침 설거지도 끝났고 은미 씨가 늘어놓은 차통도 다 정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헐. 사, 산적? 거무스름한 얼굴에 시커먼 송충이 눈썹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덩치 큰 남자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동대문에서 한복집 하는 김덕남입니다.”
헐. 생긴 것과는 또 완전 다른 나긋한 말투에 나는 또 놀랐다. 그는 옷이 들어있을 것 같은 커다란 가방과 두 권의 두툼한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얼른 그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엄청나게 무거웠다.
나는 어물어물 인사를 하고 그와 함께 안채의 상담실로 들어갔다. 은미 씨는 예쁜 것으로 고르면 보여 달라 덧붙였다. 대청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두 분이 마주 앉아 흑임자 다식과 함께 맑은 차를 드시고 계셨고, 그 옆에는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가 작은 상 앞에 앉아 차와 약과, 한과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여기를 찾는 손님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을 대번에 보여 주었다. 마당에는 젊은 커플,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 머리를 식히러 온 것 같은 중년 남자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대충 훑어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상담실은 은미 씨가 미리 정리를 해 둔 것 같았다. 방이 넓게 치워져 있었다. 한복집 사장님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게 주고, 내가 들고 있던 옷가방을 받아 옷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창틀에 옷들을 걸었다. 옷걸이 채 싸 온 옷들이 척척 걸리기 시작했다.
“오...”
나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옷들을 보며 감탄했다. 먼바다의 깊은 푸름을 담은 바다색,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의 산 색. 그렇게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깊은 바다의 물빛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저고리, 정말 푸르른 산을 뚝 떼 온 것 같은 초록빛 저고리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정말 노비 옷 같았다. 각양각색, 다양한 디자인의 옷 여섯 벌을 걸어 둔 그는 카탈로그를 휘리릭 펼쳐 몇 가지 옷을 쿡쿡 짚었다.
“요기 제가 가지고 온 저 옷들은 제가 디자인해서 직접 만든 옷이고요, 요기 카탈로그 제품들은 재고도 있고 주문 제작도 가능한 옷들입니다. 골라보세요.”
고르라고요? 또? 어떻게? 뭘? 나는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뒤적거리기만 했다. 그 사이 밖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 아무거나 일할 때 입기 좋고, 출퇴근할 때도 덜 민망한 옷이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의상점 사장님은 빙긋 웃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걸린 옷 여섯 벌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백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그런 옷들로 챙겨 왔습니다. 바지는 다 검은색이라서 어느 저고리와 매치해도 되고, 지금 입고 계시는 것처럼 항아리 단이 아니라서 외출복으로도 손색이 없지요. 저고리는 단순한 브이넥도 있고, 고름을 매는 것도 있습니다. 색깔은 최대한 수수하고 차분한 걸로 골라왔습니다. 일주일치 정도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일주일? 매일 패션쇼라도 하라는 건가. 월요일은 검정, 화요일은 파랑, 뭐 그런 건가. 천만다행이다. 무지개가 아니라서.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벽에 걸린 옷들을 살펴보았다. 의상점 사장님은 입어 보라며 짙은 와인색 저고리와 검은색 바지를 풀어 주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냥 훌렁 벗어버렸다. 어차피 남자끼린데 뭐. 그리고 어제 이미 이 방에서 스트립쇼는 했으니까. 의상점 사장님도 아무 말 없이 내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안쪽에서 고름을 매고, 바깥쪽은 단추로 잠그는 독특한 구조였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바지 역시 고무 밴드로 되어 있어서 허리 조절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저고리가 제법 내려와서 고무줄 바지인 줄은 모를 것 같았다. 까슬까슬한데 부드럽고 가볍고 헐렁하고.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더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긴소매를 걷었다.
“이렇게 접으면 배색이 있어서 예뻐요.”
의상점 사장님은 나긋하게 설명하며 걷은 소매를 다시 착착 접어주었다. 음. 예쁘네. 어느 것으로 고를까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미 씨가 옷을 보고 싶다며 온 것이었다. 의상점 사장님은 문을 활짝 열었다. 덕분에 대청에 있던 손님들까지 안을 훤히 들어다 보았다.
오메, 민망하게.
“예뻐요! 딱이네! 정우 씨, 붉은색이 잘 어울리네요. 예뻐요!”
방 안을 들여다보던 할아버지 한 분이 거들었다.
“거 총각, 훤칠하니 잘 생겼네. 저기, 저 바다색도 입어보면 어떤가? 붉은 것도 괜찮다만 푸른 옷도 잘 어울리겠어.”
“아! 아!”
얼굴에 온통 과자 부스러기를 바르고 있던 아기도 나를 보며 소리쳤다. 와. 쪽팔리게시리! 은미 씨는 한 술 더 떴다.
“아기가 봐도 삼촌 예뻐요?”
아기가 까르르 웃었다. 아기 엄마도 웃으며 푸른색을 입어 보라며 거들었다. 졸지에 패션쇼를 하게 생겼다. 의상점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대청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늘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단골인 듯했다. 은미 씨와 제법 가깝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 잘 못 걸렸다.
나는 결국 여섯 벌의 옷을 모두 입어 보았고, 가게 안의 모든 손님들이 내 패션쇼를 지켜보았다. 아. 당 떨어져.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모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철없던 시절의 내가 잠시 꾸었던 모델의 꿈, 접길 잘했다.
은미 씨는 여섯 벌 모두 구입하겠다며 손뼉을 쳤고, 할아버지 손님 두 분은 푸른색과 붉은색 옷 두 벌을 가지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할아버지들의 의견을 십분 반영해 진한 회색 옷을 입었다. 어느 쪽이든 입었다간 다른 할아버지의 지팡이에 맞을 것 같았다. 구경하던 회사원들이 감탄했다.
“와. 우리도 저런 거 입고 출근하면 진짜 좋을 텐데.”
“그러게요. 진짜 편해 보여요. 그렇다고 막 아무렇게나 입은 것 같지도 않잖아요.”
아니요. 저기요. 깊이 생각 좀 하고 말씀하세요.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아무리 요즘 출근복이 자유롭다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요? 입고 다니면 안 쪽팔리겠어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러 삼키고, 나는 대청에 벗어 두었던 까만 앞치마를 둘렀다. 이건 뭐... 저승사자도 아니고. 온통 시커멓다. 하필이면 운동화도 까만색이라서. 어디 짚신 파는 데 없나. 고급 노비로 업그레이드됐는데 짚신을 신어야 할 것 같았다. 은미 씨는 아주 마음에 든다며 연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만 훑어요. 더 피곤하니까.
“점심 드셔야죠?”
“네! 손님들 가시고 나면 먹어요.”
그렇게 말하는 은미 씨의 얼굴은 이미 허기로 인한 짜증들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토마토를 씻었다. 한 입 크기로 자른 토마토에 설탕을 뿌리려는데 은미 씨가 들어왔다.
“토마토랑 설탕은 합이 맞지 않아요. 토마토는 소금이랑 잘 맞아요.”
그녀는 소금 병을 집어 들고 넓은 접시에 소금을 얇게 깔았다. 포크로 토마토 하나를 콕 찍은 그녀는, 삼겹살을 소금에 찍듯 살짝 찍어 냉큼 입에 넣었다.
“소금을 찍어도 단 맛은 나요. 짠맛이 토마토의 숨은 단 맛을 살려주거든요. 차가운 성질의 토마토에 마찬가지로 차가운 설탕을 섞으면 배탈 나기 딱 좋아요. 아주 더운 날, 몸을 힘들게 움직이고 난 뒤에 설탕을 뿌린 토마토를 조금 먹는 것은 당 보충도 되고 좋지만, 많이 먹으면 해로워요. 소금을 조금 찍어 먹는 편이 땀을 흘린 뒤에 염분 보충에도 도움이 되고요. 토마토는 소금을 살짝 곁들여 먹는 것이 그냥 먹는 것보다 좋아요.”
은미 씨는 토마토와 설탕과 소금에 대해 설명하며 썰어 두었던 토마토 절반은 먹어치웠다. 대단하다, 이 여자.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음부턴 설탕 대신 소금을 곁들일게요. 곧 점심 먹어야 하니 이것만 드세요.”
나는 남은 토마토와 소금 접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은미 씨는 방글방글 웃으며 사랑채의 작은 마루로 향했다. 손님들도 저마다 일어설 채비를 했다. 보통 식사 후에 차를 마시지 않나? 식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러 오다니. 조금 신기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은미 씨가 어제처럼 으르렁 거리는 것은 무서웠다. 나는 서둘러 밥을 안치고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손님들이 하나둘 빠져나 가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