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믿음의 가운데에서(4)>
상을 깨끗이 닦아 들고 들어가니 은미 씨는 서랍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찾아놓은 것 같은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상을 놓고 그것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정우 씨, 이 병에 해당화 술 좀 담아주세요.”
나는 그녀가 내미는 새하얀 전통 주병을 받아 들었다. 건넛방으로 들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술병들 사이에서 눈을 시퍼렇게 뜬 시커먼 뱀을 보고 기겁하다가 다른 술병을 깰 뻔한 것 말고는, 무사히 은미 씨가 시키는 대로 해당화 술을 담을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주병에는 꽤 많은 양이 들어갔다. 커다란 술병의 삼분의 일이 비었다. 조심조심 주병을 들고 다시 상담실로 들어왔을 때, 여자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금방 깨어나서 다행인 듯했다. 은미 씨는 또 술을 한 잔 따라 건넸다. 여자는 잘도 받아먹었다. 내 착각일까. 처음보다 안색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보였다. 창백하고 누르스름했던 얼굴에 연분홍 핏빛이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은미 씨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아 상 위에 있던 작은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나는 그 상자 안을 볼 수 있었다. 상자 안에는 자그마한 구슬 같은 거무튀튀한 환약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영양제 환약 같았다.
“이것은 가감진심단 (加減鎭心丹)입니다. 기혈이 부족하고 심신이 안정되지 않을 때 먹는 약이지요. 극심한 스트레스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난 병을 치료할 때 씁니다. 한 번에 50알씩, 이 해당화 술과 함께 드시면 됩니다. 만약 유난히 몸이 좋지 않은 날은 일반 청주를 따뜻하게 데워 같이 드십시오. 해당화 술은 데우시면 안 됩니다. 그늘지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시고 하루 한 잔 이상은 드시면 안 됩니다. 식사는 부드러운 쌀미음을 조금씩 자주 드시고, 차차 양을 늘리시면 됩니다. 거르셔야 할 음식과 드셔도 될 음식, 복용법 등 자세히 정리해서 함께 넣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좀 쉬십시오.”
은미 씨는 차분하게 설명하고 여자의 손에 있던 빈 잔을 받았다. 여자는 다시 누우며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반복하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은미 씨는 조용히 약과 술병을 나에게 건네고 작고 길쭉한 서랍을 열더니 향 하나를 꺼냈다. 마주 보는 창을 조금씩 열고 향을 피워둔 그녀는 조용히 나가자며 속삭였다. 하얀 연기가 길게 피어올라 바람 속에 흩어졌다.
은은한 꽃향기도 나고 나무 냄새도 나고 비 온 뒤의 산에서 나는 이끼 냄새 같기도 했다. 신기한 향내를 킁킁거리며 맡고 있으니, 은미 씨는 내 옷깃을 끌어당겼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나에게 은미 씨는 누르스름한 봉투를 펼쳐 내밀었다. 언제 봉했는지, 주병은 코르크처럼 생긴 나뭇조각이 막고 있었다. 나는 봉지 안에 약상자와 주병을 넣었다.
“정우 씨, 죄송한데 저 시원한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아니다, 시원한 커피요. 달달한 거 먹고 싶어요.”
은미 씨는 대청의 서랍을 뒤적이며 종이와 붓펜을 꺼냈다. 오. 뭔가 좀 있어 보이는데? 벼루 내놓고 먹 갈라고 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나는 빙긋 웃으며 봉투를 한쪽에 내려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겸사겸사 달달한 과일과 약과를 같이 준비했다. 밥이 많이 아쉬워 보였던 그 얼굴을 어찌 잊으랴.
캡슐 커피 머신, 누가 개발했는지 모르겠지만 노벨평화상 줘야 한다. 진짜. 내 몫도 하나 더 만들어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 두고, 은미 씨 몫은 간식과 함께 챙겨 대청으로 가지고 나갔다. 은미 씨는 대청에 앉아 상을 펴 놓고 신중한 얼굴로 처방전인지 복용서인지를 쓰고 있었다. 한약은 먹는 방법부터 어려운 약이니까 저런 정성도 이해는 됐다.
그나저나 연화 선녀는 보내주려면 좀 정상적인 사람을 보내주지, 약 삼키다가 목에 걸려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보내냐. 어휴. 전 재산을 내놨다니. 얼마일까? 한 이삼천 될까? 그런 목돈을 덥석 내놓을 만큼 간절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큰돈을 들고 있다는 게 더 부럽다. 나는 언제쯤 그런 통장 쥐어 보나.
은미 씨는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멀어져서 마당의 테이블에 앉았다. 담배나 하나 피우고 올까. 슬그머니 일어나 은미 씨의 눈치를 살피는데, 은미 씨는 고개도 들지 않고 끄덕였다. 응? 내가 왜 일어서는지 안다는 건가? 내가 주춤거리고 있자 은미 씨가 말했다.
“다녀오세요. 시간 좀 걸리니까요.”
오. 눈치 겁나 빠르네. 혹시 관자놀이에 눈 있으세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사랑채 뒤로 돌아갔다. 잘 닦아 놓은 낡은 의자에 편히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부연 연기가 흩어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눈앞에 안개가 끼는 기분이다.
종교 문제도 그렇고, 모든 것에 있어 옳고 그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았다. 나의 생각과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워오고 또 경험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내 눈에는, 내 생각에는, 내 기준에서는 내 것이 옳고 내 것이 바르니까. 나에게는 그러니까. 그래서 나와 다른 남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다른 것일 뿐인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남이 틀리다고 보인다. 그래서 남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바로잡고 싶은 거다. 상대방의 생각은 중요치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다. 정답이 정해진 시험이 아닌 이상, 인생은, 삶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어떻게 행동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도 그 사람이 지는 거니까.
상대방이 잘 되길 진정으로 바란다면, 우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나도 안다. 어떻게 행동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그건 다섯 살짜리 아이도 알 거다. 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사람은... 글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 역시 그러하지 못하니까.
담배가 다 탔다. 담배꽁초를 깡통에 던져 넣고 나는 일어섰다. 마당으로 돌아가자 아직도 글씨를 쓰고 있는 은미 씨가 보였다. 나는 조용히 내 몫의 커피를 들고 살금살금 대청으로 다가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걸터앉아 그녀가 쓰는 종이를 힐긋 들여다보았다. 붓펜을 꺼내길래 한자도 막 쓰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냥 깔끔한 궁서체다. 진지한 궁서체. 궁서체로 복용법, 식사법, 걸러야 하는 것, 합이 맞는 것 등을 꼼꼼하게 적고 있었다.
오. 글씨 잘 쓰시네요. 멀리서 보면 프린트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유심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은미 씨는 싱긋 웃었다. 아직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커피만 조금 줄어 있을 뿐이었다.
“글씨 잘 쓰죠? 저.”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럽습니까? 근데 자신 있게 말할 만했다. 정말 잘 쓴다.
“그러네요. 프린트한 줄 알겠어요.”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강하게 동의했다. 정말로 잘 썼다. 인정. 완전 인정. 완벽한 궁서체다. 은미 씨는 킬킬 웃었다. 하얀 종이가 거의 다 채워졌다. 빼곡하게 쓰인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툭 물었다.
“믿음이라는 게 뭘까요?”
내가 물어놓고 내가 놀랐다. 미쳤다. 왜 이런 소릴 하는 거지? 나는 얼른 엎질러진 말을 주워 담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은미 씨는 고개를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들고 있던 붓펜을 놓았다. 종이는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
“내 마음이죠.”
순간 나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은미 씨의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가만히 나를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 무언가를 알아차린 내 얼굴이 보였다. 은미 씨는 빙긋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믿음 역시 내 마음이에요.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은 내 것이니까요. 기쁨도, 슬픔도, 고뇌나 혼란도. 모두 내 것이니까요. 믿든 말든, 내 마음인데 내 자유잖아요? 자기의 감정을 남이 강요한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잖아요. 슬퍼 죽겠는데 너 웃어. 그런다고 웃음이 나올까요? 미친 듯이 웃긴데, 너 울어. 그런다고 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죠. 믿음도 같은 거 아닐까요? 믿고 싶으면 믿는 거고, 믿기 싫으면 안 믿는 거죠.”
내 표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 은미 씨의 까만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말, 틀린 부분이 있을까? 어쩌면 모순적인 부분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말, 완전히 맞는 말인데? 내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문현답도 이렇게 똑 부러질 수 없다. 멍청하게 뱉은 질문 하나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내 마음이다. 믿든 말든 내가 결정하고, 믿지 않아서 아프든, 믿어서 망하든. 어차피 그 결과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책임이 되는 거다. 저 여자처럼.
믿지 않아서 시달리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책임이 된 것이다. 내 한 몸 편하고자, 그저 장단만이라도 맞춰 주었다면 저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믿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과 자유 의지로 버티고 부딪치며 저렇게 자신을 갉아먹고 만 것이다. 내 몸이 축날지언정, 내 신념은 꺾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산송장처럼 저런 몰골을 하고도 끝까지 버텨내는 저 정신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 점은 칭찬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버티는 건 고집이고 아집이다. 지나쳤다. 저 여자도, 저 여자의 시모나 친모도. 모두 다 지나치게 몰입하고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다. 아마도 그들에겐 믿음 따위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며느리를 꺾으려는 시모, 어떻게 해서든 시모에게 지지 않으려는 며느리와 그것을 도우려고 삐뚤어진 도움을 베푸는 친모. 그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 은미 씨는 싱긋 웃더니 다시 펜을 들었다. 시선은 종이로 돌아갔다. 나는 물이 송송 맺힌 컵을 들고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부드럽고 고소하면서 달콤하고 쌉쌀하다. 참... 오묘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세요. 마음을 주는 것은 자유지만, 그래서 마음을 다치면 그것 또한 자신의 고통이니까요.”
은미 씨는 차근차근 글자를 쓰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자유지만, 그 생각만으로 괜한 동정이나 조언을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그래. 내가 뭐라고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겠어.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저 여자가 안쓰럽고 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지 말고 이겨내라 응원을 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은미 씨는 내게 다정하게 전해 주었다. 딱 잘라 안 된다는 말 보다, 이렇게 헤아려주는 저 말이 얼마나 크게 와 닿는지 안다.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부드럽게 할 수 있는데. 갑자기 갑질 아줌마가 생각나서 한숨이 나왔다.
“은미 씨는 종교가 없나 봐요.”
이제 다 적었는지, 펜을 치우고 종이를 후후 불어 말리는 은미 씨를 보며 내가 물었다. 그녀는 종이를 팔락 팔락 흔들며 남은 잉크를 말렸다. 잘 말랐는지 손으로 여기저기 만져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천천히 접기 시작했다.
“저는 제 자신을 믿거든요.”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하얀 봉투에 넣으며 은미 씨는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빙긋 웃었다. 하얀 봉투 겉면에는 호은당이라는 한자가 작게 쓰여 있었다. 봉투를 봉하는 것까지 마친 그녀는 드디어 과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요.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누구도 나를 온전히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요.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요. 아, 가끔은 용감한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요.”
은미 씨는 바삭한 소리를 내는 한과를 물고 나를 보았다. 하얀 쌀 튀밥 부스러기가 눈송이처럼 푸르르 날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행주로 튀밥 부스러기들 슥슥 닦았다.
“그리고 밥 잘하는 노비의 도움도 받고요.”
은미 씨는 소리 내어 까르르 웃었다. 마당에는 포근한 봄날의 햇살이 넓게 내려앉아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푸른 잎을 조금 매단 나무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맞춰 잎을 흔들며 같이 웃었다. 나는 모처럼 미세 먼지 없이 맑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상담실에서 잠든 여자가 일어나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주 시원한 물을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