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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4.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0-선물(1)>

<에피소드 10-선물>




 세연 씨의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며 오랜만에 호은당엘 들른 연화는 제법 핼쑥했다. 그사이 나는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점심과 저녁을 챙겨 퀵서비스를 이용해 연화의 법당으로 도시락을 보냈다. 꽤 신경 써서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연화는 까칠한 낯을 하고 왔다. 나는 무더운 이 7월의 말에 삼계탕을 끓였다. 수삼, 전복, 버섯에 은미 씨에게 얻은 약재까지. 기력 회복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때려 넣고 약 삼계탕을 끓였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중복이었다. 호은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삼계탕을 맛깔나게 뜯어먹던 연화가 세연 씨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요즘도 미술관 언니 연락 와?”


 세연 씨는 그 날 이후 내게 종종 연락을 해 왔다. 잠 많은 은미 씨를 대신해 위급상황에 연락을 받기 위해 내 연락처를 주었는데, 세연 씨는 사사로운 연락을 꽤 자주 했다. 단순히 끼니를 챙기는 연락이나 날씨 걱정이 전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살코기를 입에 넣었다.


 “응. 어제는 연극 보러 가자고 하던데. 피곤하기도 하고 덥고. 사람 북적대는 곳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 정도 정성이면 데이트 한 번 해 줘라.”


 나는 픽 웃었다. 데이트는 무슨. 그냥 고맙다고 보답하겠다는 거 철벽 치니 뭐라도 내밀려는 거겠지. 그런 귀족 딸이랑 내가 무슨 데이트냐. 내 반응에 연화와 은미 씨는 기겁했다. 아니, 왜?


 “세상에. 사람이 눈치가 이렇게 없어도 살 수 있구나. 고자네, 고자야. 아빠, 장가가긴 글렀다. 연애는 해 본 적 있어? 여자 손은 잡아 봤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모태솔로세요?”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이래? 좋은 거 먹여놨더니 왜 정신줄을 놓고 그래?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어이없다. 아니, 그럼 지금 그 귀족 집안 아가씨가 나 같은 노비 나부랭이한테 진짜로 관심이 있어서 연락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나도 내 분수는 알거든?


 “아, 진짜. 놀리지 마요. 모쏠 아니고요, 연애도 몇 번 했거든? 고무신 신은 여친도 있었다고.”


 물론 입대하자마자 거꾸로 신긴 했지만.


 “와... 큰일이다, 언니야. 우리 아빠 장가가긴 글렀다. 진짜... 세상에 이런 둔탱이도 있구나. 우리 아빠 불쌍해서 어쩐대. 이러다 총각으로 늙어 죽겠네.”


 “네가 아빠라고만 안 부르면 돼. 나한테 관심 가지던 손님들도 네가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기겁하더라. 날 무슨 쓰레기 보듯이 쳐다본다니까.”


 연화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아빠로 굳었다. 덕분에 손님들이 엄청나게 오해했다.

 내 나이 서른둘. 생일도 아직 안 지났으니 만 서른. 스물넷 짜리 딸이 있다. 더구나 연화의 액면 나이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20대 중후반. 은미 씨와 언니 언니 하며 아빠라고 부르면... 나와 비슷한 또래인 은미 씨까지 딸이 되어 버리는 마법 같은 일이 생긴다. 도대체 내가 몇 살에 널 낳아야 아빠가 되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내가 정말 정말 동안이라고 치고, 네가 딸이려면 내가 몇 살이어야 하는데?

 연화가 단 댓글 때문에 내가 만든 호은당 공식 인싸그램 팔로워 수가 10분의 1이 증발한 적도 있었다. 그놈의 아빠 소리. 어휴. 어떤 손님은 정말 궁금했는지, 진짜 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기도 안 찬다. 이제는 오빠라고 부르면 어색할 정도다.


 삼계탕을 맛있게 비우기가 무섭게 은미 씨와 연화의 손에 질질 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백화점... 을 왜! 여긴 왜!

 남성복 매장을 전부 다 들렀다. 들르는 매장마다 몇 벌씩 옷을 걸쳐보고 나와서 옆 매장에서 또 걸쳐보고. 무한 반복했다. 남성복 매장 십 수 개를 다 들르고 나서,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카페테리아에 던져두고 두 사람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느 매장의 어떤 옷은 핏이 어땠고, 색감이 어땠다, 어느 매장의 어떤 옷은 소재는 좋은데 디자인이 별로라던가, 어느 매장은 가격에 비해 너무 싼 티가 난다거나.

 열을 올리며 대화하는 것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나는 다디단 캐러멜 시럽을 넣은 커피를 쭈욱 들이켰다. 와. 힘들어. 이제 집에 가겠지?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라고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나는 다시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렀던 매장들 중 다섯 곳을 다시 가야 했고, 또 몇 벌의 옷을 입어보았다. 그리고 그 옷들은 모조리 쇼핑백에 담겨 내 손과 어깨에 매달렸다.


 “아니, 이 옷들을 왜 사주냐고!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왜요, 뭔데. 예? 또 뭐 시키려고 이렇게 투자하는데요? 들어나 봅시다. 예?”


 “뭐긴 뭐야. 우리 아빠 장가보내기 프로젝트지.”


 지나가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하... 제발 밖에서는 아빠라고 하지 마라. 응?


 “미안. 우리 오빠 장가보내기 프로젝트!”


 그건 또 뭔데! 하지 말라고! 장가고 시집이고 난 생각 없다니까! 난 싱글이 좋아! 비혼 주의라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나는 비혼 주의자라고 설명했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화려한 골드 싱글로 살 거다. 제발. 좀. 혼자 마음껏 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가정의 행복, 자식이 주는 기쁨 그런 거 몰라도 되고. 귀한 남의 집 딸 데려다 고생시키기도 싫고, 남의 부모님 앞에서 손님이니 가족이니 하면서 어색한 상황 타파하려고 애쓰는 것도 싫어. 우리 부모님 앞에서 남의 집 귀한 딸이 굽실거리는 꼴도 보기 싫고, 나 역시 그런 사람 되고 싶지 않다고. 혼자 그냥 넉넉하게 살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즐길 거 즐기면서 그렇게 가늘고 길게 살다 가고 싶다. 제발. 좀.

 하지만 그 말을 들어 먹으면 연화 선녀가 아니고 백은미가 아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내 의사 따위 무시하고 명품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와... 나 집에 갈래.




 “이번 주말에는 유난히 덥다더라. 아까 산 레몬색 셔츠랑 회색 바지랑 마지막에 샀던 재킷 걸치면 예쁠 거 같아.”


 “아냐. 남색 스트라이프 셔츠가 더 나아. 재킷은 입지 말고. 더운데 무슨 재킷이야.”


 “아냐. 실내는 에어컨 빵빵하니까 있어야지. 그리고 여름 재킷은 여자가 미니스커트 입으면 무릎 덮어주는 용도지, 입는 용도가 아니잖아.”


 “그건 그래. 그럼 가방이 문젠데... 아까 샀던 그 체크 포인트 가방은 어때?”


 “아냐. 안 어울려. 에잇! 일단 다 꺼내보자!”


 호은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이미 방전된 나를 보고 은미 씨는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가 사랑채 마루를 등으로 닦든, 얼굴 기름으로 광을 내든 관심도 주지 않고 조금 전에 사 온 옷들을 주르르 꺼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 수십 벌의 옷과 소품들을 하나하나 매치하고 겹치고 바꾸면서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다.

 하... 미치겠다, 정말. 도대체 뭐 하는 건데! 왜 내 약속을 늬들이 멋대로 잡고 멋대로 코디하냐고! 왜! 왜 내가 주말에 세연 씨랑 뮤지컬을 보러 가야 하냐고! 진짜... 웬수 덩어리들.

 나는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사랑채 뒤로 들어갔다. 낡은 의자에 털썩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랑채 너머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왜 세연 씨랑 뮤지컬을 보러 가야 하는데? 그것도 알아듣지도 못 할 외국어로 노래하는데 말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세연 씨랑 뮤지컬을 보러 간다 치자. 그래. 데이트한다 쳐. 가는데, 왜 내 옷을 늬들이 그만큼이나 사고, 또 왜 그걸로 늬들이 코디한다고 난리를 치냐고. 왜 데이트 코스를 늬들이 짜냐고! 왜 식당을 늬들이 예약하고 스카이라운지는 왜 가는데?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거길 왜 그 여자랑 가야 하냐고! 나 일 할 거라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제발요. 저기요, 님들아. 나는 호은당 노비, 아니 직원이지, 진짜로 댁들 오라비가 아니라고요. 장가 못 간 노총각 오빠 대하듯이 하지 말라고. 좀. 제발. 미쳐버리겠다. 진짜. 진짜 너무 부담스러워서 울고 싶다. 차 우리고 손님 접대하는 직원도 아니고,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밥 해주는 노비도 아니고. 내가 늬들 장난감이냐...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진짜 이건 아닌데.

 담배를 깡통에 던지고 나왔다. 대청마루 위에는 옷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그거 더럽게 비싸더만 그렇게 함부로 다뤄도 됩니까?


 “은미 씨, 연화야. 내가 한참 생각했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생각해서 일부러 이렇게 신경도 써 주고 데이트 코스 조언도 해주고 한 거 아는데... 고마운데... 이건 좀 아니다. 은미 씨, 저는 여기 직원입니다. 세연 씨는 그냥 약방 손님이고요. 저는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질 마음이 전혀 없어요. 은미 씨가 아무리 고용 주라 고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기분도 별로고요. 진짜 노비나 노리개 된 기분이라 별로 안 좋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정말 부담스럽고... 진짜 저는 누굴 만나거나 연애하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제발 그만하고... 그거, 내일 다 환불해 올게요.”


 싸늘해졌다. 신나게 떠들던 두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진짜 아니지. 권력 남용이지. 하는 시선으로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미 씨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정우 씨. 저희는 진짜 정우 씨를 위해서 한 거였는데 그렇게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여자인 우리가 봐도 세연 씨는 정말 착하고 참해서 정우 씨 짝으로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박박 우겼는데... 그렇게까지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정우 씨랑 세연 씨가 잘 어울려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음... 옷들은 이미 샀고... 이미 연화가 가격표랑 다 뜯어버려서 환불은 안 되니까, 그냥 두고 입으세요. 음... 부담스러워서 싫으시면, 우리가 요 며칠 설레발친 것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오빠, 나도 미안해. 난 진짜 오빠랑 언니랑 잘 어울려서 밀어주려고 한 거였거든. 이제 다시는 그 어떤 미인이 나타나도 오빠랑 안 엮을게. 미안해. 진짜, 진짜 미안해. 사과의 뜻으로 생각하고 옷은 받아 줘. 환불하러 가면 모양새 빠져서 싫어. 다시는 안 그럴게. 응?”


 갑자기 저렇게 순순히 사과하니 또 무안하다. 그렇게 열을 올리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두 사람이었는데.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긴 했나 보다. 미안해하는 두 사람을 보니 내가 괜히 미안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사과를 합니까? 그냥 알아주시면 됩니다. 옷은 주시니 받을게요. 안 그래도 옷 사야지 하고 생각은 했습니다. 제가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두 사람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할 테니, 그때 도와줘요. 지금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세요. 지금 말고요. 솔직히... 우리끼리 말이니까 하는 소리지만, 세연 씨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가볍게 풀어 넘기려는 내 마음을 안 걸까. 두 사람은 까르르 웃으며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나도 옆에 서서 상자 안에 구두를 담았다.


 “알았어. 다음에 지인짜 오빠 스타일 만나면 이야기해. 우리가 책임지고 서포트해 줄 테니까!”


 “그래. 너만 믿는다, 꼬맹아.”


 나는 빙긋 웃으며 연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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