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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5.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0-선물(2)>




 감정에 기복이 생기면 사람은 틈이 생긴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감정이 변하는 순간, 그 순간에 사람에겐 빈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빈틈은 나에게도 있었다. 나란 병신. 나가 죽어라.

 나는 새하얀 자동차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호은당 대문이 빠끔 열리고 은미 씨와 연화가 고개를 내밀었다. 파이팅은 무슨. 내가 싸우러 갑니까...


 나는 병신이다. 나는 등신이다. 나는 멍청이다. 나는 호구다. 지난 휴일의 일이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고 옷 선물도 받았다. 그래. 그래서 내가 들뜬 탓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버렸다.

 나는 비싸고 좋고 예쁜 옷들을 입고 싶었다. 입고 나가서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래. 사실 입고 나갈 곳이 마땅찮았으니까. 그 비싼 옷들을 입고 친구들과 막창을 구울 수는 없지 않은가. 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나는 못 한다. 손 떨려서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다 양념 한 방울 튀면 울 것 같아서 못 한다.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멍청하게도 뮤지컬 이야기를 꺼냈고, 은미 씨도 연화도 아무 말 안 했는데 내가 나서서 세연 씨와 만나겠다고 했다. 그 날의 내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아. 이 병신 박정우.


 어쨌거나 나는 세연 씨와 뮤지컬을 보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하고 호은당을 나섰다. 연화와 은미 씨는 열과 성을 다 해 나를 꾸며 주었다. 연화는 향수까지 사 와 내 재킷에 꼼꼼하게 뿌렸다. 두 사람이 난리를 부리는 것을 의아하게 보던 손님들에게 연화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 장가보내려고!”


 제발 묻지도 않은 말은 하지 좀 마! 아빠 소리도 좀 하지 말고! 몇 테이블뿐이던 손님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도대체 이 콩가루보다 더 바스러진 집구석은 뭐지? 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더는 변명이고 뭐고 할 생각도 없다. 오해하든지 말든지. 나는 연화가 내미는 향수 냄새 범벅의 재킷을 받아 들었다. 어우, 독해.

 은미 씨가 내 손에 무언가를 꼭 쥐어 주었다. 그것은 약초 캐러 갈 때 탔던 흰색 suv 차키였고, 나는 의문의 손자국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연화는 이제 괜찮다며 웃었다. 두 사람은 파이팅을 외치며 나를 배웅했고,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차에 올랐다. 아, 씨. 하필이면 이 차야. 차 없어도 되는데. 아오.


 하지만 덕분에 공연장까지 편하게 왔다. 차가 조금 밀리긴 했지만 늦지는 않았다. 공연장 입구의 계단을 열심히 올라갔다. 로비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들 사이에서 세연 씨가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세연 씨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단발머리였던 것만 기억한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정우 씨?”


 “아. 세연 씨.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호은당 밖에서 뵈니까 못 알아보겠어요.”


 아하하... 민망하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려다 참았다. 연화가 심혈을 기울여 손질한 머리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세연 씨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 자리 좋고. 무대와 가깝지만 너무 앞자리는 또 아니라서 무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 몇 십만 원 할 텐데. 역시 금수저는 다르구나. 나는 이런 공연 티켓을 사는 자체가 부담스러운 서민이다.


 “저, 실은 이번에도 거절당할 줄 알았거든요.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수줍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세연 씨는... 그래. 그게 다다. 아무리 돌려보고 틀어보고 뒤집어 봐도, 설레지는 않는다. 두근거리는 느낌이 없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세연 씨는 꽤 미인이었다. 뽀얗고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 키는 작지만 비율은 좋은, 미인에 가깝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이 사람이 여자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수줍게 웃는 저 모습도 내게는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은당 일이 바빠서 자꾸 거절했는데 죄송합니다.”


 딱딱한 말투. 내가 느끼기에도 내 말투는 너무나 사무적이다. 호은당 손님들, 그중에서도 약을 지으러 오는 귀족 나부랭이들에게 하는 그 말투. 내가 생각해도 내 말투는 상당히 차갑고 무뚝뚝했다. 하지만 세연 씨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보다. 미안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펄쩍 뛰며 자기가 더 미안하단다. 바쁜 사람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어색했다. 세연 씨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연화와 은미 씨의 말은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왜? 저런 대단한 사람이 왜 나 같은 사람을? 그래서 오늘도 큰 부담 없이 나왔다. 굳이 사례를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도 없고, 어찌 됐든 예쁜 옷도 생겼으니 마수걸이도 할 겸 말이다. 하지만 지금 세연 씨를 보니...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귀신한테도 동정심을 가지는 호구 중에 상 호구인 사람이니, 그저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싶은 모습 같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정말로 내 연예 세포들이 죄다 자살이라도 한 건가. 나는 횡설수설하며 혼자 당황했다 웃었다 하는 세연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니... 재미는 있네.


 뮤지컬이 끝나고 은미 씨가 예약 해 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뮤지컬의 답례라면서 말이다. 그래야 나도 빚지는 기분이 아닐 것 같았다. 답례라고 무언가를 받을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이대로 끝내기에는 찝찝하기도 했고. 깔끔하게 주고받는 걸로 끝을 보고 싶었다. 은미 씨가 예약한 곳은... 하. 정말.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긴 했지만, 내가 호은당에서 일을 하지 않았거나, 세연 씨와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갈 일도 없고 갈 생각도, 아니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법한 고급 일식 레스토랑이었다. 세연 씨는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어머! 저 여기 오마카세 코스 정말 좋아하는데! 정우 씨도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아. 그래요. 오마카센지 오니기린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 크지 않은 깔끔한 건물, 발렛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광봉을 들고 다가왔다. 나는 키를 넘기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어휴. 더럽게 비싸겠네. 뭐, 한 끼 정도야... 아까 뮤지컬 티켓 값에 비하면 얼마 한다고. 연화가 그랬다. 메뉴판 따위 쳐다보지도 말고 셰프 오마카세로 주문하라고.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닥치고 외우라고 했다. 그래. 닥치고 외운 그대로, 나는 직원이 내미는 메뉴판을 빙글 돌려 내밀었다.


 “셰프 오마카세로 2인분 부탁합니다.”


 세연 씨는 방글방글 웃으며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부담스러워. 근데... 꼭 이렇게 나도 금수저 인 척 연기해야 하나? 이건 내가 아닌데.

 뭐, 상관없나. 오늘 보고 안 볼 사이니까. 허세 좀 부리면 어때. 나는 가볍게 마음먹기로 했다. 은미 씨는 밥 먹고 나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로 가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운전도 해야 하니 술은 됐고, 밥이나 간단하게 먹고 가지, 뭐. 다행히 은미 씨와 연화를 따라 코스 요리 전문점은 몇 번 가 봐서 이제 어색하지는 않았다.


 “저... 정우 씨는 호은당에서 얼마나 일 하셨어요?”


 응? 그건 왜 묻지? 별게 다 궁금하네.


 “이번 달이 지나면 7개월입니다.”


 뚝. 대화는 끊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해삼과 해삼 내장을 다져 만들었다는 괴상한 음식과 작은 전복이 통째로 올려진 달걀찜, 얇게 썬 송이버섯 하나가 들어있는 된장국이 나왔다. 우리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 저, 그때요... 저랑 약사님이 선녀님 법당에 갔던 날...”


 아. 그 이상한 놈이 내 꿈에 온 날. 가위에 눌리는 것은 무섭고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놈을 놀린 것은 재미있었다. 나쁜 놈을 혼내 준 것 같아서 왠지 뿌듯하기도 했었고.


 “아, 예. 그 날...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나는 누런 해삼 내장들이 흐늘거리는 속에서 해삼 한 점을 골라 먹고는 고개를 들었다. 으, 맛이 뭐 이래. 세연 씨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그때의 이야기를 물었다.

 연화가 갑자기 전화해서 막 웃더니 내 덕분에 세연 씨가 산다고 했단다. 내가 세연 씨를 지켜 주었다나, 어쨌다나. 자세한 일은 세연 씨도 어째선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지만,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고 했다. 내가 그 날 꿈에서 놈을 약 올리며 잡아 둔 덕분에 연화가 대응할 시간을 벌었고, 생각보다 쉽게 놈을 세연 씨 몸에서 떼어냈다고 했다. 놈은 내가 진짜 세연 씨와 무슨 사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세연 씨를 향한 집착보다 나를 향한 분노가 더 컸다고. 뭐야. 그럼. 내가 위험했던 거 아니야? 뭐, 어쨌거나 잘 해결됐으니 됐다.

 아. 그럼 내게 갚고 싶다던 감사가 그거였구나. 세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길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이다.

 우리 앞에 초밥 몇 점이 올라간 기다란 접시가 놓였다. 오. 이거 그 비싸다는 도미? 와. 맛있겠다. 나는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음. 맛있다. 진짜 맛있네. 예술이다, 진짜. 마트 초밥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이래서 비싼 음식을 먹는구나.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잠은 잘 주무시나요?”


 배가 고팠다. 초밥 몇 점을 얼른 먹고 나서야 나는 물어보았다. 세연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웃는 게 귀여운 아가씨다. 인기 많겠네. 웃는 것만 보면... 연화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금수저는 집안만 좋은 게 아니라 외모도 완벽하구나.


 길고 긴 코스요리는 깔끔한 과일 아이스크림으로 끝이 났다. 다 먹고 나오니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배가 불러서 술이고 뭐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연 씨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더니 공연장으로 데려다 달란다. 차를 거기 세워두었다면서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공연장으로 향했다.

 커다란 공연장은 캄캄했다. 반쯤 비어있는 주차장 가운데, 하얀색 자동차가 서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세연 씨를 따라 차까지 함께 갔다. 아무리 주차장이고 대로변이라지만 혹시 모른다. 어두운 시간에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뮤지컬 재미있었어요.”


 거짓말이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 난다. 노래는 잘하더라. 세연 씨는 활짝 웃었다.


 “정말요? 열심히 고른 보람이 있네요!”


 공짜 표 얻은 거라면서요. 거짓말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허술하면 어떡합니까? 내가 픽 웃자 세연 씨는 얼른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나는 운전석 문을 열어주고 손짓했다. 빨리 가세요. 나도 집에 가서 발 닦고 잘랍니다. 피곤해 죽을 맛이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 저...”


 뭐, 왜. 왜요. 뜸 들이지 마요. 진짜 무서워요. 뜸 들이다가 폭탄선언 자주 하는 누구누구가 떠올랐다. 세연 씨는 머뭇거리다 차에 올랐다. 나는 냉큼 문을 닫았다.


 “그... 다음에 또...”


 설마. 또 뮤지컬 보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세연 씨가 쭈뼛거리며 뭐라 말하려는데, 등 뒤쪽 공연장 건물이 있는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지러지는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비명소리.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는 보이는 것이 없는데.


 “창문 올리고 곧장 출발하세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나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만 까딱이고는 얼른 돌아서서 공연장 건물이 있는 계단 위로 달려갔다. 비명소리는 하나에서 둘, 둘이 넷, 지금은 못해도 열 명은 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112 버튼을 눌렀다. 당장이라도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게 손에 꼭 쥐고 얼른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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