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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6.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0-선물(3)>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은 건물의 옆에 난 작은 출입구 쪽이었다. 직원들이나 배우들만 다니는 별도의 입구인 듯했다. 건물을 빙 돌아 달려가는 사이, 나처럼 비명을 듣고 온 것 같은 사람들 서넛과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112는 지우고 은미 씨의 번호를 띄웠다. 그리고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열서너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 데 뒤섞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미친 듯이 웃거나 하늘이 무너진 듯 울거나. 혹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깔깔 웃는 사람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고,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하는 사람에게 욕을 하며 발길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손뼉 치며 웃는 사람도 있었고, 혼자 쪼그려 앉아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모두 나체였다. 주변에는 그들이 벗어던진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과 속옷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뒤로 나왔다. 이거... 뭐가 이상한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 중에 한 사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까 무대 위에서 보았던 배우였다. 노래를 정말 잘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잘 생긴 미남 배우였는데, 홀랑 벗고 알몸으로 서서 허공에 대고 복싱하듯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다 안 보이는 손에 맞았는지 억! 하며 쓰러지는 연기도 했다.

 이거... 단체로 미친 거 아니야? 소란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도 경악한 채 멈추어 있었다. 경비원 몇 명이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가고, 나머지 경비원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촬영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나는 천천히 건물 반대편으로 돌아가 어둑한 구석에 서서 은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미... 응? 연화냐? 아니, 응. 응. 아니, 잠깐만. 지금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그거 좀 물어보려고. 아, 데이트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여기 지금 공연장인데, 공연했던 배우들 같은데... 이 사람들 단체로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아서. 홀딱 벗고는 난리가 났어. 권투하고 울고 웃고 화내고 싸우고 노인인 척, 아기인 척 뭐 아무튼 난리야. 알았어.”


 연화는 몰래 영상을 찍어 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래 있지 말고 곧장 호은당으로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살금살금 돌아가 약 10초 정도 짧은 영상을 남겼다. 더 있다간 저기서 달려오는 경비원들에게 들킬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후다닥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세연 씨의 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고, 나는 곧장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최대한 빨리 가서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내 생각엔 이 사람들에게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단체로 마약을 한 건 아니겠지. 내 오지랖이긴 하지만,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나는 곧장 호은당으로 향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연화는 냉큼 내 휴대폰을 받아 갔다. 10초 남짓 짧은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은미 씨와 연화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연화는 이상한데.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있어. 하는 말만 반복했고, 은미 씨는 말없이 작은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불편했던 옷을 얼른 갈아입고 왔다. 역시 생활한복이 최고다. 아, 시원하고 편하고. 한복 최고.

 시원한 물을 한 잔 들고 나와 두 사람이 집중하고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뭐가 좀 보이냐는 물음에 연화는 땋아놓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언니는? 뭐 이상한 거 느껴져?”


 “무당은 너지. 이거,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어요?”


 은미 씨는 특정 화면을 자꾸만 돌리고 또 돌리다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노트북을 들고 왔다. 큰 맘먹고 샀던 노트북은 주로 은미 씨 취향의 드라마 구매에만 썼다. 오늘 이 놈도 뭔가 일다운 일을 하려나 보다. 나는 휴대폰과 노트북을 연결하고 화면을 띄웠다. 꽤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초조한 기색의 은미 씨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여기, 나왔어요.”


 동영상을 재생했다. 크게 보니 흔들림이 더 심해서 멀미가 날 정도였다. 10초 남짓한 영상에서 7초와 8초 사이를 몇 번이나 돌려보던 은미 씨는 손가락으로 화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은, 노래를 잘 부르던 그 가수의 발치였다. 남녀 할 것 없이 훌렁 벗은 나체들이었지만 그런 것은 관심 없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 거무튀튀한 상자가 있었다. 정확한 색깔은 모르겠지만, 보자기처럼 보이는 천 뭉치가 그 옆에 떨어져 있었고,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반듯한 상자와 대충 던져놓은 뚜껑이 보였다. 뭐지, 이게...?


 “이거... 혹시 봤어요?”


 “아니요.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전혀 몰랐다. 미친 짓을 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는 살필 틈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또 저었다. 은미 씨는 손톱을 입에 물었다. 불안하면 나오는 저 버릇. 괜히 나까지 불안했다. 연화는 가만히 화면 속 상자를 노려보았지만 역시 모르겠다며 일어났다.


 “여기에 이 사람들, 짐이라고는 나뒹구는 작은 가방들뿐이에요. 그중에 유일하게 부피가 큰 건 이거뿐이고요. 문제가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거 아닐까요...?”


 은미 씨는 손가락 끝을 입에 문 채 가만히 화면을 노려보다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초조한 기색으로 전화기를 노려보는데, 화면이 밝아지며 메시지 도착 알림이 울렸다. 냉큼 확인 한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 노트북, 챙기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며 노트북을 덮었다. 이미 연화는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있었고 은미 씨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덜컥 덜컥, 무언가를 마구 뒤지고 있었다.


 원래 은미 씨는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들과 얽히는 것을 싫어한다. 도움을 구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잘 돕지 않는다. 자기 기준에서 가엽다고 판단되는 사람, 혹은 이 사람 때문에 자신이, 나나 연화가 피해를 볼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나서서 도왔다. 그것도 아닐 경우에는 상대방이 가진 것 중,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일까. 이 사람들이 가여워서? 아니면 내가 거길 다녀와서 문제가 되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저 상자가 무언가 특별한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호은당을 나가서까지 일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무언가 확신이 있다는 거다. 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 나는 은미 씨가 대청에서 던지는 키를 낚아챘다. 까만 스포츠카의 키였다. 먼저 달려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이 차를 겁 없이 몰았다. 내 안의 레이서 본능이 깨어났다.


 가는 내내 은미 씨와 연화는 뒷좌석에서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며 연화는 짜증을 냈다. 이건 내 분야가 아니야. 라며 결국 고개를 돌렸다. 은미 씨는 조용히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했다. 나는 주말의 밤을 즐기러 나온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공연장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분명히 과속 딱지 두어 장은 날아올 것이다.


 “저기죠?”


 은미 씨는 차가 멈추기 무섭게 튀어 나가더니 냅다 달려갔다. 쪼그만 게 엄청 빠르다. 나와 연화도 그녀를 따라 힘껏 달렸다. 이미 주변은 조용했다. 경비원 한 사람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은미 씨는 명함을 내밀고 뭐라 뭐라 설명했다. 가로등 불빛에 명함을 이리저리 비춰 보던 경비원은 은미 씨의 뒤에 선 우리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라 손짓했다.

 한 시간쯤 전에는 난장판이었던 입구 주변은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드문드문 밟히고 부러진 꽃들과 풀들만 보였을 뿐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안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쇼핑백 두 개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옷가지들이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고 이내 경비원 한 사람이 헐떡이며 들어오더니 쇼핑백들을 챙겼다.


 “정신 들었대요. 옷 보내주고 올게요.”


 젊은 경비원은 아주 무서운 물건을 챙기듯 부르르 떨며 가방을 들고 달려 나갔다.


 “상자가 하나 있지 않았나요?”


 “아, 여기. 이겁니다.”


 우리를 데리고 온 경비원은 책상 끄트머리에 있던 붉은 보자기로 싼 네모난 것을 끌어당겼다. 은미 씨는 후다닥 보자기를 풀었다. 아무 무늬도, 색깔도 없는, 허여멀건 나무 상자였다. 뚜껑에도, 몸체에도 그 흔한 브랜드 마크도 없었다. 아주 튼튼하게 잘 만든 것 같은데... 뚜껑을 열었다. 축축한 흙냄새가 확 끼쳤다.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뭐, 배우한테 선물이라고 준 모양인데... 이게 중요합니까?”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에 든 것 하나를 꺼냈다. 송이버섯 같았다. 아주 커다란 송이버섯. 갓 크기만 해도 내 주먹만 했다. 상자 안에는 축축한 이끼가 깔려 있었고, 그 안에는 은미 씨가 들고 있는 것 같은 커다란 버섯 두 개, 손으로 마구 찢고 뜯은 것 같은 너덜너덜한 버섯 하나가 더 있었다. 은미 씨는 찢어진 버섯을 들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나도 같이 냄새를 맡았다. 송이 특유의 향은 전혀 없고, 그저 비릿하고 눅눅한 비 온 뒤의 산 같은 냄새가 났다. 썩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상쾌한 습기 냄새가 아니라 축축하고 답답한 냄새가 났다. 조금 더 뒀으면 쉰내가 날 것 같은, 그런 냄새.


 “제가 가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배우 물건이고... 곧 국과수에서 가지러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은미 씨는 버섯을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경비원이 다시 슬그머니 보자기를 싸 묶었다. 나와 연화는 눈치만 살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명함을 넣어서 같이 국과수로 보내 주십시오.”


 경비원은 그 정도쯤이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보자기 틈에 명함을 넣었다. 은미 씨와 우리는 그렇게 돌아 나와야 했다. 차로 돌아와 은미 씨는 다시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했고, 나와 연화는 차 밖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었다. 저 멀리서 빨강 파랑 반짝이는 차가 들어왔다. 승합차에서 까만 조끼를 입은 사람들 몇 명이 나와 건물로 들어갔다. 이내 다시 나온 사람들의 손에는 아까 보았던 보자기에 싼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손에 든 작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무언가는 명함처럼 보였다. 은미 씨의 명함일 것이다. 의외로 경비원이 순순히 은미 씨의 말을 따른 것이 신기했다. 나와 연화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담배꽁초를 팽개치고 차에 올랐다.


 “가지고 갔습니다.”


 “따라가는 거야? 첩보 영화처럼?”


 “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요즘 기름 값이 얼만데. 아까 경비원이 알려준 병원으로 가요. 연락은 저 쪽에서 올 겁니다.”


 은미 씨는 노트북 화면이 아닌 창밖의 국과수 승합차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나는 왠지 그 미소가 낯설다고 느껴졌다.


 배우들이 입원 해 있다는 대학병원으로 가는 길, 은미 씨는 더 이상 영상을 보지 않았다. 대신 조용하게 앉아 창밖만 보고 있었다. 연화는 졸린다며 투덜거리다 잠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여럿 있었다. 은미 씨는 당당하게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입구를 막고 그녀를 세우는 사람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직하게 무언가 속삭이더니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안내했다. 뒤에서 기자들이 수군거렸고 플래시도 몇 번 펑펑 터졌다.


 “아, 진짜. 쌩얼인데. 모자라도 쓰고 나왔어야 되는데.”


 “네가 뭐 연예인이냐?”


 “그럼. 저어기 높은 데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지.”


 연화는 콧대를 세웠다. 허. 그래. 잘 나셨어요. 우리는 바쁜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참을 걸어가다 어느 하얀 문 앞에 섰다. 신경정신과...? 문이 열리고 은미 씨는 우리를 밖에 둔 채 들어가 버렸다. 아, 왜! 궁금한데! 아주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닫히기 직전의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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