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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9.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0-선물(4)>




 얼마 뒤, 은미 씨는 나이 지긋한 의사와 함께 나왔다. 내가 신경정신 과목의 전설이다! 하는 포스가 풀풀 풍기는 사람이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또 길고 복잡한 복도를 돌고 돌았다. 철창으로 문을 한 겹 더 대어놓은 복도가 나왔다. 그 앞에도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의사를 보고 후다닥 달려오다 그를 따르는 우리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개량한복을 입은 두 남녀와 헐벗은 수준의 늘씬한 아가씨.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등장인물일 테지.


 의사는 다른 환자분 보호잡니다. 하고 냉정하게 잘라 버렸다. 기자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사이, 의사는 철창문 너머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철창은 다시 굳게 닫혔다. 어두운 복도와 문마다 달린 까만 유리창은 모두가 자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연화는 하품을 했다.

 의사가 알려주는 방의 문을 열자, 온몸을 묶은 채 잠이 든 여섯 명의 외국인이 보였다. 저마다 링거 줄을 달고 삑삑 소리를 내는 기계를 머리와 가슴에 붙인 채 자고 있었다. 은미 씨는 연화를 불렀다.


 “잘 살펴봐. 혹시 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졸음 가득하던 연화의 눈이 반짝 빛이 나며 또렷해졌다. 아, 얘도 일 할 때는 프로페셔널하구나. 근데... 이거 하면 누구한테 돈 받아? 달러도 받나? 나는 멀거니 환자들을 살펴보는 은미 씨를 졸졸 따라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연화는 이미 대충 슥슥 훑고 난 뒤였다. 좀. 성의껏 해라. 하는 척이라도 하던지. 의사는 건너편 방을 가리켰다. 연화는 겁도 없이 혼자 조르르 캄캄한 방으로 가 버렸고 나는 은미 씨와 의사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다.


 “모두 다 기억을 못 합니까?”


 “예. 아주 당황스러워했지요. 왜 여기 있냐며, 공연장에 테러가 있었거나 버스 전복 사고라도 났냐고 하더군요.”


 아. 저 사람들, 병원에 와서 정신 차렸구나. 홀딱 벗고 미친 듯이 놀았던 건 기억 못 하는구나. 이미 핵심 내용들은 의사와 따로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아무리 들어도 조각 모자란 퍼즐 같았다.


 “성분 분석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나오면 저희 쪽에도 통보가 올 겁니다. 선생님께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 은미 씨에게 굉장히 공손했다. 의외네.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면 좀 거들먹거리거나 그런 면이 있을 줄 알았다. 젊은 여자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리고 여자면 무시부터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딴에는 일부러 졸졸 쫓아다녔는데, 은미 씨가 꽤 유명한 사람이었나. 아까 공연장 경비원도 그렇고. 의외로 성별과 외모에 큰 차별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나. 아니면... 은미 씨가 정말로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인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잠든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잘도 자고 있었다. 저 쪽 끝에서 자는 배우 한 명은 코까지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연화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며 하품했다. 의사는 연화를 가만히 바라보다 싱긋 웃고는 인사했다.


 “연화 선녀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일전에 도와주신 덕에 해결이 잘 되었습니다.”


 “당연하잖아. 알지? 나 연화 선녀야. 근데 이 사람들, 멀쩡한데?”


 어우,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 아버지뻘은 되고도 남을 사람한테 말하는 본새 좀 봐. 얼른 눈치를 주었지만 연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정제를 투여하니 거짓말처럼 제정신이 되었습니다. 선녀님이 보시기에는 이상 없는 것 같습니까?”


 “응. 아무것도 없는데.”


 은미 씨는 환자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반대편 방으로도 갔다. 역시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몸은 묶여 있었고 기계 장치와 링거 줄을 달고 있었다. 아, 여기 아까 그 배우도 있다. 그는 양 팔을 교차시켜 묶어 놓은 소매 긴 옷을 입고 아이처럼 잘만 자고 있었다. 와. 이런 옷, 실제로 쓰긴 쓰는구나. 신기하네.


 “그럼 결과받으시면 연락 주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시오.”


 어...? 너무 극존대하는 거 아닌가. 어색하고 불편한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철창을 넘어 나왔다. 기자 두 사람이 달려와 물었다. 은미 씨와 연화 선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내 뒤로 옮겨왔다. 그래. 맞다. 나 노비였지.


 “실례합니다. 비켜주십시오.”


 한참 입을 꾹 닫고 있었더니 목소리도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두 사람 사이를 벌리려는 듯 움직이자, 기자들은 더욱 찰싹 붙어 질문했다. 비켜 줄 생각이 없다는 뜻 같았다.


 “환자들 상태는 어떤가요? 배우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


 “환자 분들이랑 무슨 관곕니까?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뭘 하시는 분들이십니까?”


 이거 뭐야. 무슨, 죄짓고 연행되는 범인들한테 달려드는 기자들 같다. 뉴스에서나 보던 그런 모습. 괜히 기분이 나빴다. 적어도 자기소개 정도는 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하고 양해 구하는 게 먼저 아니야? 기분 나쁘게 다짜고짜 뭐 하는 거지?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무슨 무례입니까? 어느 언론사 소속입니까? 거기서는 이따위로 취재합니까?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는 아예 취급하지 않는 곳입니까? 질문하기 전에 본인 소속과 신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나는 얼른 그들의 목에 걸린 카드를 보았다. 쳇. 뒤집어 놨네. 한 사람은 기자 신분증도 없었다. 그들의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카메라를 내렸다. 방송사 마크도 없었다. 뭐야, 이 사람들.

 나는 기세를 몰아 소리치며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손끝이 기자 한 사람의 옷깃을 스쳤다. 헉, 심장 떨려. 이걸로 폭행이니 뭐니 하면서 고소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여기가 병원인데 아예 드러누워 버리는 건 아니겠지? 저 카메라로 다 찍고 있는 거 아니야? 막, 호은당의 소사는 폭력배. 이런 기사 쓰는 거 아니겠지? 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뒤에서 우리 뒷모습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복도를 돌았다. 은미 씨와 연화를 앞세우고 다시 발을 빨리 놀리는데,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돌아보니 역시나. 카메라와 기자 두 사람이 눈과 렌즈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거 참. 집요하네. 우리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라고 아까 의사가 말했는데. 그들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내가 수시로 돌아보며 째려보아도 꿋꿋이 버티고 우리를 카메라에 다 담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와 연화는 기자들을 씹어댔다. 연화는 쌩얼을 찍었다며 욕했고 나는 쫄았던 마음을 풀 길이 없어서 욕을 했다. 아오, 씨. 진짜 쫄았다고. 펜이 얼마나 무서운데. 내일 일어나면 기사부터 찾아봐야겠다.


 호은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노트북 화면 속에서 훌렁 벗고 너울너울 춤추거나 울고 웃고 소리 지르는 외국인들을 보며 심각하게 토론했다.


 “아까 그 버섯, 뭡니까?”


 입이 심심하다는 말에 말린 오징어를 구워 왔다. 은미 씨는 고추장에 푹 찍은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안채의 상담실에 들어갔다 왔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 버섯은 목면지(木面芝)라는 겁니다. 먹으면 흥이 넘쳐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요란하게 웃게 하는 버섯입니다.”


 “에엥...?”


 은미 씨는 페이지를 파라락 넘기더니 어딘가를 펼쳐 내밀었다. 연화는 그 버섯의 이름을 듣자마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에서 춤추고 싸우고 울고 웃는 나체들의 영상을 꺼버렸다.


 “그랬구나. 어쩐지. 이제 이거 안 봐도 되지? 으으. 징그러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펼쳐진 페이지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목면지(木面芝)는 나무 가면 위에서 자라는 버섯인데 나무 가면 아무데서나 자라는 것은 아니고, 특정한 주술이 걸린 가면의 위에서만 자란다.… 단지 가지고만 있어도 전염병이 퍼지는 독특한 저주가 걸려 있다. 물론 소유하지 않고 버린다면 병이 재발하지 않는다.… 가면을 습기 찬 곳에 오래 두면 가면 위에 버섯이 피는데, 이것이 바로 목면지(木面芝)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런... 이런 거, 만화나 소설 속에나 나오는 거 아니야? 이게 진짜 존재한다고? 나는 책을 덮었다. 은미 씨는 책을 받아 들고 빙긋 웃었다.


 “아주 오래전, 경기도 광주에서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먹은 사람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흥이 돋아 웃음이 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춤을 추게 됐다고 합니다. 그때의 목면지를 먹은 사람은 그저 웃고 춤을 춘 것으로 끝이지만, 이번에 먹은 사람들은 예술인이라서 그런 걸까요. 흥을 표출하는 방법이 조금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거, 죽거나 그러는 건 아니죠?”


 “네. 시간이 지나면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중독도 안 되고 독성도 없고요. 그냥 그 순간의 흥이 지나쳐서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 정우 씨, 남들 앞에서 홀랑 벗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실 건가요?”


 “... 죽고 싶겠네요.”


 은미 씨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라도 쪽팔려서 자살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기억을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흥이라기보다는... 헛것을 보는 것 같았는데...


 “아, 모르겠다! 다 알았으니까 자자! 나, 자고 가도 되지?”


 연화는 땋은 머리를 풀며 하품하더니 안채로 쏙 들어갔다. 나는 은미 씨가 들고 있던 책을 살그머니 다시 받아 들고 페이지를 찾았다. 은미 씨는 싱긋 웃더니 먼저 씻을게요. 하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목면지라는 한자를 찾기 위해 한참이나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찾고 있던 페이지를 펼쳤다. 나는 섬세하게 그려진 버섯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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