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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10.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3-새 식구  은동이(1)>



<에피소드 13-새 식구 은동이>


 은석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충격이 컸던 것은 나뿐이었던 것 같다. 가끔 멍하게 넋을 놓는 일이 가끔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차차 그때의 일들을 잊어갔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은석이의 눈빛도, 남편과 사별했지만 웃으며 잘 지내는 하나 씨도, 자신의 자식이고 형제인 은석이의 영정사진도 보지 않으려던 녀석의 가족들 얼굴도. 그리고 빨간 일본식 옷을 입고 호호하고 웃던 은미 씨와 그녀 얼굴 위를 스쳐간 무언가까지. 나는 많은 것들을 천천히, 그렇게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내 목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던 죄책감이 조금 가벼워질 무렵, 호은당에 가을이 찾아왔다. 손님이 부쩍 늘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6개월을 못 넘길 줄 알았는데, 벌써 8개월이 넘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잘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밥 잘하는 노비를 누가 잘라. 우민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밥은 나밖에 못 한다. 아무렴.


 우민이에게 사과 폰을 사 줬더니, 제일 먼저 한 일은 호은당의 인싸그램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그 전의 인싸그램 계정은 내가 간간이 만드는 차나 간식, 달이고 있는 약의 사진을 올리는 정도였는데, 우민이 녀석은 똑같은 사진을 찍어 올려도 전문가가 찍은 것처럼 멋지게 보정해서 올렸다. 거기다 약을 달이는 은미 씨의 평범한 뒷모습을 올리면서도 얼마나 멋들어진 글귀를 적어 넣는지, 오글거리기도 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녀석의 글재주에 놀랐다.

 덕분에 호은당 인싸그램의 팔로워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었고, 덩달아 손님도 늘었다. 우민이의 서글서글한 성격과 환한 웃음이 단골 유치의 핵심이었다. 특히 젊은 손님이 엄청나게 늘었다.


 은미 씨는 찻집 손님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우민이는 인싸그램을 통해 이벤트도 하고 홍보도 열심히 해서 꽤 많은 단골을 만들었다. 요즘은 약방 손님보다 찻집 손님으로 버는 돈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날래고 재바른 우민이 덕분에 나도 훨씬 편했고, 마당에는 테이블이 두 개 더 늘었다. 제법 북적거리는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가을 같은 어느 휴일, 서늘한 비가 내렸다. 이게 가을비인가 보다. 비도 오고 파전이나 부쳐 먹을까 하며 장바구니를 덜렁 들고 호은당을 나서는데 약초꾼 아저씨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오고 있었다. 아저씨 뒤에는 얼마 전부터 동행하는 보조 약초꾼도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여, 박 소사! 나야 늘 잘 지내지. 자네나 호은당은 무탈한가? 응? 어디 가는가?”


 “아, 예. 비도 오고, 점심엔 전이나 부쳐 먹을까 해서요. 들어가 계시죠. 금방 재료 사 와서 푸짐하게 부쳐 보겠습니다.”


 “하하하! 딱이구만! 안 그래도 막걸리나 한 잔 할까 해서 오는 길이었어.”


 뒤따라오던 다른 약초꾼 아저씨가 커다란 상자를 들어 보였다. 대낮부터 얼마나 드시려고 박스째... 허허... 전 몇 장 구워서 될 일은 아니겠네.

 나는 빗길을 서둘렀다. 몇 가지 전을 부칠 재료들과 고등어 두 마리를 사고 호은당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대문 밖에 나와 있는 의외의 사람을 보았다.


 “은미 씨? 밖에서 뭐 하세요? 비 오는데.”


 대문 아래, 알량한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은미 씨의 표정은 심통이 가득해 보였다. 뭔 일이야? 아저씨한테 혼났나? 그때, 대문 너머에서 앙칼지게 짖는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에엥?


 “저는 저거 싫어요.”


 은미 씨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비 오는 마당의 타프 아래에서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풀잎을 씹다가, 잡초에 놀라고, 제 발에 걸려 나뒹군다. 뭐 저런 개가 다 있어? 나도 개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기인 것 같은데... 덩치는 좀 컸다.


 “뭡니까, 이 개는?”


 약초꾼 아저씨들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강아지들과 놀고 있었다. 우민이는 아예 그냥 강아지와 혼연일체였다. 벌써부터 제가 주인이라도 된 양, 훈련을 시킬 거라며 사료 한 주먹을 손에 들고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산에서 주워 온 아기 강아집니다. 어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버리고 간 건지, 어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흘 뒤, 하산 길에도 그 자리에 혼자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굶어 죽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는데... 제가 혼자 살다 보니 못 키울 것 같아서요. 산에 가면 일주일, 열흘 씩 집을 비우니까.”


 그래. 그건 그렇다.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혼자 집에 덩그러니 둘 수는 없으니까. 보조 약초꾼 아저씨가 허허 웃었다. 대청에 올려놓은 박스를 열어보니, 막걸리 열 병, 개 사료, 밥그릇, 목줄, 산책용 줄, 강아지 옷 몇 벌, 강아지용 샴푸와 배변 패드 한 봉지가 담겨 있었다.

 허허허... 우리더러 키우라고요? 저는 싫은데요. 은미 씨도 개 싫대요. 저도 싫은데요.


 “하하하... 약방에 개는 좀...”


 내가 싫은 티를 은근슬쩍 냈더니 우민이가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은미 씨도 반대를 했던 모양이다. 나라도 찬성을 하면 조금 더 우겨 볼 작정이었던지 약초꾼 아저씨들의 얼굴도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장바구니를 주방으로 들고 들어가며 덧붙였다.


 “뭐, 그래도... 은미 씨가 허락하면 어쩔 수 없죠. 결정은 은미 씨가 하는 거니까요.”


 싱긋 웃었다. 우민이는 벌떡 일어나 대문으로 달려갔다. 녀석의 뒤를 약초꾼 아저씨 두 사람도 함께 따랐다.


 반려동물 들일 때는 고민 많이 해야 한다는데. 나는 고민할 것 없이 반대요. 차라리 개에 대해 잘 아는, 더 행복하게 키워줄 수 있는 집을 찾아서 보내는 편이 낫다. 나는 사 온 쪽파와 배추, 버섯 등을 손질하며 파전을 구울 준비를 했다. 그 사이, 강아지는 주방 문 앞에 딱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새하얀 털과 까만 눈동자. 이마 정 중간에 난 동그란 털. 마치 옛날 개그맨 김동남 아저씨 같았다. 두 손에 올려놓으면 꽉 찰 것 같다. 작긴 한데... 어느 정도 성장 한 몰티즈나 요크셔테리어 정도? 새끼로 보이는 거라곤 저 순박하고 앳된 얼굴뿐, 덩치는 제법 크다. 다 크면 얼마나 크려나.


 혀를 빼물고 헥헥헥, 웃는 것 같은 저 얼굴이 귀엽긴 하다만... 나는 별로. 손도 많이 가고 일거리도 많아진다. 개가 싫은 건 아니다. 개를 키우는 건, 사람 아이 하나 키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개도 생명인데, 당연히 보살펴주고 챙겨주어야 한다.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 보통의 책임감으로는 안 될 일이다. 귀찮다고 미루고 내팽개칠 것 같으면 애초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


 대문 너머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는 은미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서가 아니다. 끝까지 책임 질 자신이 없는 거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알 수 없고.

 더욱 중요한 건, 여기는 영업을 하는 업장이다. 일반 찻집도 아니고 약방. 의도치 않게 개가 약초나 약을 망가뜨릴 수 있고 찻집 손님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물론 지금 대문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우민이 말처럼, 강아지를 보려고 오는 손님도 생길 수 있다. 마스코트가 될 수도 있고, 산책하면서 자연스레 홍보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산책, 내가 해야 하잖아? 나는 하루가 바쁜 사람이다. 강아지랑 산책할 시간은 없다. 강아지는 마트에 들어갈 수도 없고.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강아지를 외면하고 부침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강아지는 여전히 헥헥거리고 있었다. 거 참. 신경 쓰이네.

 결국 나는 주방을 나섰다. 대청에 놓인 박스를 뒤적거려 작은 밥그릇과 사료 봉투를 꺼냈다. 한쪽에는 사료를, 반대쪽에는 물을 담아 비가 떨어지지 않는 대청 아래에 놓아주었다. 강아지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졸졸 쫓아오다가 밥그릇을 내려놓으니 냄새만 킁킁 맡다가 그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배가 고픈 게 아니었나. 내가 개를 키울 수 없는 이유가 또 늘었다. 개가 원하는 것을 모르겠다.



 나는 팬에 기름을 주르륵 두르고 잘 손질한 쪽파를 반죽에 풍덩 담갔다.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점심때다. 뭐라도 먹이면서 설득하던가 해야지, 안 그랬다간 배고픈 은미 씨에게 뭔가를 조르다가 자신들의 목이 졸릴 거란 걸 저들은 모르고 있다. 내 손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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