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3-새 식구 은동이(2)>
“아, 누우나아아아.”
우민이는 은미 씨를 큰 누나, 연화를 작은 누나라고 부른다. 나는 그냥 형. 은미 씨는 우민이가 약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무지무지 싫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겠지. 지금 우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아양과 애교를 총동원해 은미 씨를 꼬드기고 있었다. 커다란 개가 태풍 몰아치는 날 산책 가자며 주인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다.
은미 씨는 우민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파전만 맛나게 먹고 있었다. 나는 노릇하게 구운 배추전을 잘라 앞에 놓아주었다. 은미 씨의 젓가락이 이사 왔다.
“개는 보험도 안 되잖아. 아프면 병원비는 어쩔 건데?”
“아, 진짜. 정말 정말 열심히 일 한다니까! 나도 형처럼 계약서 쓸까? 응? 종신 노비 계약?”
타프 위로 비가 투둑 투둑 떨어지는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다. 종신 노비 계약이라는 말은 듣기 싫었고. 약초꾼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막걸리 한 사발을 내게 건넸다. 나는 시원하게 쭈욱 들이켜 비우고 남은 파전 두 점을 입에 넣었다. 빈 접시를 챙기며 나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에엥? 박 소사, 자네 종신 노비였나?”
“... 설마요. 여전히 무기한 계약직 신셉니다.”
“무기한이라 종신인 거 아니야?”
“종신 노비로 쓰려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해야죠.”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며 킬킬 웃었고, 애가 단 우민이만 진흙 범벅이 된 하얀 강아지를 꼭 안고 은미 씨를 조르고 있었다. 은미 씨는 강아지가 다가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피했다. 강아지의 눈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우민아, 그만. 은미 씨는 개가 무서워서 싫다고 하는 거잖아. 그만 졸라. 낯선 사람 들락거리는 곳에서 사는 것보다, 마당 넓고 개에 대해 잘 아는, 식구 많은 좋은 집에 입양 가서 사랑받고 사는 게 훨씬 나아.”
“무, 무서워 하긴 누가요! 하나도 안 무섭거든!”
은미 씨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막걸리 사발을 비웠다. 약초꾼 아저씨는 씩 웃더니 은미 씨의 사발을 다시 채워 주었다.
“아, 그럼, 그럼. 우리 은미는 개 안 무서워해. 천하 여장부 백은미가 개 한 마리를 무서워하겠어?”
“아... 그렇구나... 큰 누나는 개 무서워하는구나...”
우민이는 능청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두 사람, 언제 이렇게 죽이 잘 맞게 됐지? 지금까지 몇 번 안 봤는데. 나는 보조 약초꾼 아저씨와 은미 씨 눈치를 살피다 주방으로 도망쳤다. 아저씨는 내 몫의 막걸리까지 들고 왔다. 마당에서는 여전히 은미 씨와 우민이의 설전이 한창이었다.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안 무서워! 그깟 개새... 강아지!”
“아, 그래. 알았어. 그렇다고 해 줄게. 뭐, 개 무서워할 수도 있지. 이해해.”
“아니라니까! 안 무섭다고! 안 무서워!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키워? 안 무서운데 왜 못 키워? 안 무서우니까 키우면 되지. 솔직히 말해봐. 진짜 무서워? 누나가 무서워서 싫다고 하면 나도 포기할 게.”
“안 무서워! 안 무섭다고! 그깟 개 한 마리 키우는 게 뭐 대수라고! 무서워서 안 키우려는 게 아니라...!”
“그럼 키우는 거지? 아싸! 은동아! 너는 오늘부터 호은당 마스코트다!”
뭐, 벌써 이름까지 다 지어 놨네. 은미 씨가 저렇게 간단하게 말리는 건 처음 봤다. 아니, 말렸다기보다는 그냥 져 준 것 같은데.
나는 청양고추를 잔뜩 넣은 느타리버섯전을 냉큼 뒤집었다. 빨리 구워서 갖다 줘야지. 스트레스받으면 매운 거 엄청 찾더라. 나는 보조 아저씨와 킬킬 웃으며 막걸리 잔을 비웠다.
마당에서는 강아지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추는 우민이와, 그런 우민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약초꾼 아저씨,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은미 씨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 개, 어느 산에서 주워 오신 거예요?”
나는 잘 익은 전 하나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아저씨는 막걸리를 비우고 뜨거운 전을 입에 넣었다.
“아. 금강산에서요.”
“아아....... 에, 네? 네에에에?!”
뭐? 금강산이요?! 일만 이천 봉 거기? 북? 북한? 북조선? 노스 코리아?! 저어기, 휴전선 너머 거기?! 거기 아무나 갈 수 있어? 거기 가서 개까지 주워서 오는 게 가능해?! 무슨, 북에 간 걸 옆집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온 것처럼 이야기합니까? 아저씨 간첩 아니에요?!
내가 기겁하는 게 확 티가 났나 보다. 아니, 사실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금강산이라니! 북한이라니요! 무슨 옆 동네 뒷산 간 것도 아니고!
내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뜨고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자, 아저씨는 씩 웃더니 프라이팬 위의 버섯전을 젓가락으로 집어 꺼냈다. 나는 정신을 챙기고 타기 직전의 전들을 아슬아슬하게 살려냈다.
“아, 아니. 거기 그렇게 마음대로 가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안 될 건 또 뭡니까? 배 타면 물 건너가는 거고, 비행기 타면 하늘 날아가는 거고. 차 타면 길 따라가는 거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무슨... 나는 진짜 할 말을 잃었다. 뭐야, 북한에 어떻게 갔다는 거지? 이 사람, 위험한 사람 아닌가? 아저씨한테 알려드려야 하나? 은미 씨는 아나? 이러다 우리 간첩 혐의까지 추가되는 거 아니야? 사기꾼을 사형시키지는 않잖아. 간첩은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이거나 그런 거 아니야? 나 죽는 거야?!
“에이. 나쁜 짓 하러 간 것도 아니고. 다시는 갈 일 없을 거니 걱정 마세요. 진짜 중요한 약초 때문에 갔다 온 거니까요.”
아저씨는 빈 막걸리 사발을 들고 주방을 나갔다. 나는 멍청한 눈으로 보조 아저씨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와... 나 진짜... 요즘 너무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 같다. 무섭다, 정말.
막걸리 10병도 다 비웠고, 열심히 구운 전들과 고등어구이까지 싹 다 비웠다. 점심 만찬 수준의 식사를 마치고 나니 배도 부르고 막걸리 덕분에 속도 뜨끈했다. 약초꾼 아저씨는 취한다며 사랑채의 우리 방에 들어가 뻗어버리셨고, 보조 아저씨는 빈 막걸리 병들을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지고 있었다. 의외로 멀쩡한 은미 씨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흙발을 한 하얀 강아지를 노려보고 있었고, 우민이는 은미 씨의 심기 따위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그저 강아지와 빗속을 뛰어놀고 있었다. 감기 걸릴라. 지난번에도 냉방병 걸려서 죽다 살아났으면서. 나는 따뜻한 생강차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
“인마, 감기 걸려서 피 토할래? 빗속에서 그만 놀고 이거 마시고 따뜻한 물로 씻어.”
내가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우민이는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녀석, 아프면 크게 아플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은미 씨는 흥 하며 찻잔을 들었다.
“저렇게 잘 노는 걸 보니 안 아프겠네요. 내가 약 주나 봐라.”
단단히 삐치셨네. 아이고. 나도 개는 별로 달갑지는 않은데... 사실 귀엽잖아요. 저 천진난만하게 노는 거 봐요. 귀엽고 예쁘긴 한데... 아. 저거 목욕은 어떻게 하나. 잠깐, 잠은 어디서 자야 하지? 집이 없는데!
“근데 쟤 집은 없어요? 잠 어디서 자요?”
“어... 저랑 살 때는 제 머리맡에서 잤어요. 제 베개 위쪽에서.”
데리고 자라고? 방에서? 개랑? 하... 하하... 사랑채가 털채 되겠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지금도 털이 뭉텅이로 숭덩숭덩 빠져 마당 잔디마다 걸려 있는데. 돌돌이 테이프... 다이또에 팔겠지? 잔뜩 사다놔야겠다. 방에서 자야 하면 쟤가 잘 쿠션이나 침대도 있어야 하고...
“마당에 개집 하나 놓으면 되죠.”
은미 씨는 심통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아직 아긴데. 사람이랑 같이 자던 애를 하루아침에 마당으로 내보낼 수는 없잖아요. 나는 입술이 댓 발은 나온 그녀를 툭 치고 웃었다. 은미 씨 달래려면 저녁 메뉴에 신경을 좀 써야겠다.
“저녁에 뭐 드실래요? 매콤하게 순대볶음? 아니면 오랜만에 아저씨도 오셨는데 회 한 접시 할까요? 얼큰하게 매운탕 끓이고?”
“매운탕. 땡초 아주 그냥 죽어라고 때려 넣고요. 회는 도미랑 광어랑 전어.”
예예. 아무렴요. 푸짐하게 주문하겠습니다. 나는 킬킬 웃으며 쇼핑몰 앱을 실행했다. 개가 쓸 물건이 필요하다. 하... 이렇게 또 법카는 한도에 가까워지는구나. 아니, 잠깐. 개 물건 법카로 사도 되나?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은미 씨는 흥 했다.
“우민이 앞으로 달아 놓을 거예요.”
결국 너도 종신 노비가 되는구나. 축하한다, 최우민. 너도 이제 노비의 길을 가는 거다. 같이 고무신 신자. 백마 표 고무신. 그거 나름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