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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08. 2021

그대와 함께 한 시간들을 위한 찬가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글쓰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아니고, 나름 바빴습니다.

노느라 바빴습니다.     


여편이 6개월 동안 휴가를 받았는데 같이 놀자고 해서 놀았습니다.

나는 프리랜서로 일했기 때문에 나름 시간에서 자유롭게 지냈지만 여편은 다릅니다.

직장생활을 하니 맘 편히 몇 달을 마음껏 쓴다는 게 꿈같은 일인 거지요.

그런데 그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무려 6개월의 휴가... 유급입니다.  

   

...

“좋은 것 단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혹시 아십니까? 글자 수가 많을수록 더 좋다는 뜻입니다.          

첫째, 굿!

둘째, 따봉!

셋째, 참 좋아!

넷째, 기가 막혀!

다섯째, 베리 베리 굿!

여섯째, 너무 너무 좋아!

그리고 일곱째...          

“더할 나위 없었다!”         

제가 딸에게 한 대답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별다른 것 없었습니다. 호화로운 숙소도 없었고, 기막히게 맛있는 식사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남들 다 하는 대로 렌트카 하고, 가는대로 가고, 먹는 만큼 먹었습니다. 덜했으면 덜했지 더한 건 없었지요.

그러나 분명히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유갓메일! <어제의 결과가 오늘의 체력> 중에서)     



휴가 초기 제주도에 갔다 온 후 썼던 글의 일부입니다.

구구절절, 세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한라산 어느 오름 정상 부근에 집단으로 핀 복수초나,

고성 화진포 응봉 정상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던 금강산 비로봉 같은 것들...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좋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곰곰 생각해 봅니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요?

결혼한 지 20년도 더된 부부가 6개월 동안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냈습니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집단생활을 한 것 말고 이렇게 오랜 시간 누구와 함께 지낸 적이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도 어릴 적 몇 년을 제하면 하루 몇 시간 같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부부도 지난 이십 몇 년 보다 이번 6개월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어쩌면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무엇’이든 함께 하는 그 시간.

그 시간의 축적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고 말한 게 납득이 됩니다.

우린 지난 6개월 동안 매일매일, 매순간순간,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제주도의 복수초나 응봉에서 본 금강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한 우리의 시간이 중요한 거였습니다.    

 

6개월을 함께 있으면서 싸운 적 없냐고요?

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이상하긴 합니다.

보통 생활을 하면서 가끔 언성을 높이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요.

이번 휴가 동안은 그런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붙어서 지냈는데도 말이지요.

그저 마냥,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     


그리고 이제 휴가가 끝났습니다.

여편은 다시 출근을 시작했고, 나도 일상으로 복귀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고 하니 좋아하는 시가 떠오릅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남아있다.

    ---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밤 숲가에 서서> 중에서     


시에서 풍기는 도덕성, 단아한 자기통제의 분위기 때문에 좋아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듭니다.   

  

“일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깊고 아름다운 숲을 더 즐기면 안 되나?”

“약속을 지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 등등...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과의 약속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이지요.

하지만 약속이란 과거의 것입니다.

약속이란 미래를 저당 잡은 과거의 시간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침범하는 게 과연 옳을까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6개월의 휴가를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이렇게 별 욕심 부리지 않고,

별 의무감 없이,

좋아하는 것 하면서,

함께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  

   

물론 그런 건 있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과, 여러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수단인 거지요.

그래서 이 작은 글쓰기에 집착했었는데,

휴가 중에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집착을 놨다고 할까요?

이렇게 구태여,(‘구차하게’라고 쓸 뻔 했습니다. 마음 속 어딘가에 내가 여러분의 사랑을 구걸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인 거지요.


나는 열려 있으니까.

일부러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냥 마음을 열어놓고,

가장 작게,

가장 한가하게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찌 되건 분명한 것은,

내가 우리 여편을 사랑하듯이 여러분 역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편과 실제적인 시간을 함께 하는 것처럼,

작은 글을 통해서나마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감사하고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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