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하태평 Sep 28. 2021

딸에게 쓰는 편지61;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고?

 

사랑하는 딸!

그동안 편지는 대체로 너한테 뭔가 가르쳐주고 싶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아빠의 고민을 터놓아 보려고 해.

고민이라기보다는 넋두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웹소설을 쓰고 싶어 해.

지난번의 쓰라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웹소설을 읽으며 공부도 하지.

문제는 내가 아무리 욕망을 하고 노력을 해도 쓰려는 웹소설이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거야.

쓰고 싶은 건 있는데 그게 손끝으로 글이 되어 나오는 게 아니라, 먼 하늘의 구름처럼 아스라이 보일 뿐이라고.

그림속의 떡이야. 먹을 수가 없어...     


‘이대로 은퇴해 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생각이야. 은퇴하고 할 게 뭐있냐고?

빵빵하게 계획이 있지. 일단 집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을 차례대로 완독하고,

음악도 전곡 듣기로 편안히 듣고,

사진을 좋아하는데 사진집 한 번 찬찬히 살펴본 적 없으니 그것도 좀 찾아보고,

여기저기 전국 명산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남아있다.

    ---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밤 숲가에 서서> 중에서     


시에서 풍기는 도덕성, 단아한 자기통제의 분위기 때문에 좋아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듭니다.     

“일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깊고 아름다운 숲을 더 즐기면 안 되나?”

“약속을 지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 등등...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과의 약속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이지요.

하지만 약속이란 과거의 것입니다.

약속이란 미래를 저당 잡은 과거의 시간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침범하는 게 과연 옳을까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6개월의 휴가를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이렇게 별 욕심 부리지 않고,

별 의무감 없이,

좋아하는 것 하면서,

함께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

...

    ---(유갓메일! <그대와 함께 한 시간들을 위한 찬가> 중에서)       


   

얼마 전 쓴 아빠 글의 일부야. 여전히 그 때의 고민이 계속되고 있는 거지.

오늘 밥 먹으며 네게 얘기했듯이,

아빠는 앞으로 6,7년 더 사회생활을 했으면 해.

책 보고 음악 듣는 소비적인 생활 말고,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좀 더 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이걸 어쩌면 좋냐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인데, 감자기 그게 떠오르네?

소설이 구체화되지 않는 지금의 내가 맞고,

소설을 쓰겠다고 계획했던 그때가 틀렸다고?

그러니 현재의 나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야.

그냥 그땐 그렇고 지금은 이런 거지. 변하고 달라졌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란 말이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야.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보면 허술하고 미숙해 보이지만, 

항상 그 시간에는 그 시간만의 진실이 있는 거야.  

   

얘기가 잠깐 샛길로 빠졌는데 어쨌든!

아빠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알겠지?


말하자면 무중력 상태?

어디로 가야할지 아직 동력이 생겨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까?     


지구별의 기본원리는 중력이니까,

아빠도 아빠의 중력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보려고 해.

생각이나 감정 말고, 몸이 허락하고 움직이는 대로.

과거의 계획이나 미래의 꿈같은 건 내버려두고.

그냥 현재의 내가 흘러가는 대로 둬봐야지.

뭐가 될지, 뭐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무중력 상태에서 떠다니는 기분이 좀 묘해.

약간 불안하고 당황스러운데, 또 조금 설레기도 해.

어디로 갈지, 무슨 길이 나타날지 예측을 안 하니까.     

그냥, 놔둬 보려고.

사실, 평생을 뭔가 “해야 한다!”고 살아왔는데,

그것 말고 한번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사랑하는 딸!

아빠의 무중력 여행이 잘 끝나길 기도해줘.

멀리 우주를 날아가서 블랙홀에 빠져버리면 안되잖아?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너랑 엄마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걱정 마.

만약 그런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작별인사는 하고 갈게.   

   

꿋- 바이!     

    ----아마도 ‘사추기’를 맞아서 방황하는 것 같은 아빠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와 함께 한 시간들을 위한 찬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