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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Feb 28. 2022

딸에게 쓰는 편지 68; 왜 사냐건 웃지요

  

우선 휴학 축하해!

네가 휴학을 하겠다고 한 게 이번이 세 번째. 재수해서 대학에 갔으니 삼수 만에 휴학에 성공한 셈인가? 입학보다 휴학이 더 힘들었네? 

    

처음에는 엄마가 휴학에 반대했고 이번에는 가부간 아무 언급이 없었는데, 엄마의 뜻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까? 아니면 너만의 독자적인 결정이었을까? 이제 4학년이 되니, 이번에 못하면 그냥 졸업이어서 엄마의 반대가 심해도 휴학을 했을까?    

 

뭐,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너는 휴학을 했잖아, 네 뜻대로. 그게 중요한 거지. 그럼 된 거야.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까.   

  

잠깐 지난번에 아빠가 휴학에 대해서 쓴 것을 떠올려보자. 


         

...시간을 벌기 위한 휴학이라면 필요 없다는 거지. 시간은 항상 있어.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유일하게 공평한 게 시간이잖아. 문제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지.       

   

휴학을 하고 싶다는 건 뭔가 다른 곳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건데, 그건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잖아? 현재 사귀는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다른 파트너를 생각한다는 거나 똑같아. 휴학을 하더라고 미련이 남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해야지.       


놔야 돼. 선택하고, 다른 욕망을 포기해야 돼. 벼랑을 잡은 손을 놓듯이, 그렇게 시원하게 놔버려야 해.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된다면?     

그 땐 벼랑을 올라가야지. 있는 힘껏,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절벽을 올라가야지. 전적으로 내 욕망에 충성해야지.          


우리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욕망의 동물이야. 욕망과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기 쉬워. 뭔가를 원하다가도, 이걸 해도 되나? 하는 반대 생각에 시달리게 되지. 물론 그런 정반합을 통해 발전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게 우리의 동력을 불완전 연소시키고 말아.   

       

그러니 선택해야 해.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긍정적인 것을, 망설임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단호함과 과감함을, 주저함보다는 질주를 선택해야 돼.     

어차피 선택할 욕망이라면 내게 도움이 되는 걸 골라야지. 따뜻한 이불 속 보다는 썰매나 자전거나 보트를 선택해야지.          


“움직여! 움직이지 않으면 우린 벌레가 된다.”        


사실 벌레처럼 살면 또 어때?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면 존중돼야지. 옛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 사람은 못 돼도 짐승은 되지 말자.”     

    

라는 대사가 화제였던 적이 있었는데, 짐승이 되면 또 어때? 문제는 그게 나의 선택이냐 하는 점이지. 내가 주체적으로 그걸 선택한 게 맞느냐 하는 거.     

     

    ---‘딸에게 쓰는 편지 64; 3학년 마침을 축하하며’ 중에서     



이렇게 한 말, 취소할게.

주체적으로, 열심히,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런 뜻으로 한 말 같은데 지금의 아빤 그 말에 반대야.     

주체적으로 살라고?

틀린 말이야. 우린 항상 주체적으로 살고 있어. 아무리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노예처럼 사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내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거야. 다만 남이 보기에, 객관적인 가치판단으로 가타부타 할 뿐이지.     

열심히,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그럴 필요 없어. 아빠가 네 휴학을 축하하는 이유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야.     

휴(休)= 쉬는 거잖아?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쉬는데 무슨 목적의식이 필요해? “난 쉬어야만 해!” 하면서 전투하듯이 쉴 필요는 없잖아? 그냥 쉬는 거지.     

가만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 쉬어본 적이 별로 없어. 항상 무언가에 갇혀 있었지.

건강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고, 즐거워야 하고...


그러지 않아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그냥 쉬어.

옳고 그름 따지지 말고, 잘 잘못 따지지 말고, 이해득실 따지지 말고 너 자신에만 집중해.

그동안 너를 짐 지운 온갖 의무와 해야 할 것들 벗어버리고,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봐. 이기적으로.

이기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이타심은 대부분 가짜야.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인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거야. ‘왜 사느냐’고 물으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고 할 수도 있고, 딱 꼬집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냥 사는 거지요.’라는 뜻이랄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빠는 좀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 말 그대로, ‘왜 사느냐’의 답이 ‘웃음’이라는 거지. 웃음이 삶의 목적이라는 게 아니라, 삶의 출발점인 거야.

내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 ‘웃음’이고,

그 웃음이 내가 세상에 전하는 최초의 메시지가 되는 거지.     


사랑하는 딸!

너는 너를 위해 웃어본 적이 있니?

너만의 시간에, 너만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운동하려고.”     


왜 휴학을 하느냐고 묻자 네가 한 대답인데, 뜬금없긴 하지만 뭐 좋아.

하지만 항상 운동하고 있을 순 없지. 운동도 끝나고, 먹는 것도 끝나고, 노는 것도 끝났을 때,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웃음밖에 없어.     


웃음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눈물이 나올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크게 소리를 치고 싶을 수도 있어.

괜찮아. 그 끝에 웃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것들은 네 웃음이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있는 거니까 마음을 놔도 돼.

분노와 머뭇거림과 슬픔을 거쳐서 나오는 웃음은 이제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실한 신호야.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확인도장이기도 하고.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고독>에 나오는 구절인데, 영화 <올드 보이>에 쓰여서 더 유명해졌어. 이 말대로 고독은 진정한 삶의 출발점이고, 휴학은 또 진정한 고독의 시작인 거지.     

굿 럭!!!     

       ---정말정말 딸의 휴학을 축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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