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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y 14. 2019

동생에게 6; 영화 <로마서 8:37>을 보고


지난번에 만나 태국 여행 갔다 온 얘기를 들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어 졌어. 너는 몇 십년지기 친구들과 처음 여행을 갔고, 나는 ‘과연 언제 싸울 것인가?’를 궁금해했지. 


돌아온 결과, 너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힘든 여행을 했다고 해. 날씨도 더웠고, 처음 겪어보는 친구들의 새로운 모습에 당황도 했겠지. 나는 ‘여행 가서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려고 가는 거다. 문제는 돌아온 다음. 친한 사이는 그 싸움을 겪고 더 친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는 돌아와서 멀어진다.’고 총평을 했어.


그런 정도로 끝내려고 했는데, 우연히 <로마서 8:37>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하고 싶은 말들이 자꾸 생각나네? 영화 자체는 뛰어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나름 성실한 자세가 돋보이는 진지한 영화야. 영화를 만든 신연식이라는 감독은 <동주>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야. 나는 <러시안 소설>이라는 그의 영화를 보고 알게 됐는데, <동주>도 그렇고 이번 <로마서 8:37>도 그렇고 문학적 상상력이 인상적이었어. 보통은 영화에서 비난할 때 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칭찬이야. 보이는 것 너머로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뜻이니까. 



영화는 유능한 젊은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갈등을 기본 사건으로 하고 있어. 교회의 운영을 놓고 신구 목사 진영이 대립하고, 주인공 목사 주변의 인물들의 다양한 대응방식도 보여지지. 너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지? 얼핏 기독교계를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영화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영화의 시선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다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목사의 아내는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해. 말 못 하는 장애가 있는 시동생에게 남편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죽는데, 그 시동생은 움막을 짓고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움막이 불에 타 역시 죽게 되지.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인 청년 전도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 소리가 들리면서 영화가 끝나.


영화에서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전개과정은 명확해. 목사의 죄를 추궁하면서 가다 보니 어떤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죄를 없앤다는 게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 

우리가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을까? 또 나는 죄 없이 살 수 있는가? 죄의 끝을 추궁하다 보면 이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되는데, 결론은 하나야. ‘그럴 수 없다!’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신을 부정하는 길이기도 하지. 죄가 없는, 완전하고 불변하는 존재는 신밖에 없으니까.


이걸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원죄라고 해도 될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영화는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와 ‘나에 대한 참회와 반성’이라고 말하고 있어.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고 다른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지. 

‘나는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죄의 나락에 빠져버리는 거야. ‘저 사람이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분열과 혼돈의 아비규환에 갇혀버리는 거지.


... 여행은 궁극적으로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고,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사라지고 우리와 세상은 모두 하나라는 깨달음을 줘. 여기까지가 인간의 길이야. 그 한계성과 유한함을 느끼고 절대적 존재를 찾아가다 보면 신의 존재를 실감할 수도 있겠지. 나는 신이 있다고 믿지만 로마를 실감했듯이 신의 존재를 실감하지는 못하는데, 그때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어. 

--<동생에게 5;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중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네 생각이 난 것은 아마 너의 태국 여행과 영화 속 주인공의 죄를 추궁하는 여행이 비슷하기 때문일 거야. 사람과 세상은 불완전하고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별개가 아니라는 인식,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참회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깨달음.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 네가 친구들이 어떠어떠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이 목사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가 할 일은 상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거야. 친구는, 목사는, 세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야. 믿음은 오직 신만이 받을 수 있지. 변치 않는 유일한 존재니까.


사랑하는 동생!

이제 교회 나간 지 세 달 겨우 지난 새내기 신자인 내가 오래된 정원 같은 너에게 이런 얘기 하니까 조금 웃기기는 하다. 새내기 신자라서 그런가, 나는 아직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로마서 8:37> 인지 이해가 안 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가 그 내용인데, 이 말과 영화는 전혀 상관이 없거든? 


어쨌든! 친구는 좋은 거야. 나와 세상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고리잖아. 여행도 좋은 거지.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거니까. 그러니 친구들과 여행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 더군다나 너의 남편이 내년에는 유럽 보내주겠다고 하니 너는 참 복도 많다! 즐겁게 누리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잘 살고 있는 동생에게 감사하는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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