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사랑이 식었나? 한동안 아침마다 성경구절을 문자로 보내더니, 왜 안 보내는 거지?
내가 가끔 보낸 성경구절에 딴지를 걸어서 그게 기분이 나빴나? 아니면 아직 성경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을 했나?
해명을 할게.
물론 그냥 읽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굳이 그것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는 이유는 이제는 네가 그걸 (말하자면 시비 걸기, 혹은 논쟁) 견디고 이겨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네 신앙적 태도가 진지해서, 너를 존중해서 나도 진지하게 대응을 한다는 얘기지.
나는 너를 존중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대답을 하는데 네가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 혹은 ‘아직 수준이 안돼.’라고 생각해서 무시한다면 누가 잘못하는 거라고 봐야 돼?
내가 <로마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야.
신약성경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내가 무시하자 너는 <요한복음>과 <로마서>만이라도 읽어보라고 했고, 그 정도라면 들어줄 수 있겠다 싶어서 나는 읽었어. 그리고 솔직하게 내가 느낀 점을 너에게 얘기했지.
“<요한복음>은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런데 <로마서>는 이상하다. 옳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옳은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강조 강요하고 있다. 중세의 암흑시대가 왜 왔는지,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주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것 같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한 인간이 쓴 이데올로기 강요다. "
논쟁적으로 과장해서 얘기했지만, 읽으면서도 나는 매우 의아했어.
<요한복음>을 읽을 때와 <로마서>를 읽을 때 왜 그렇게 다른 느낌이었을까? <로마서>를 읽을 때의 답답하고 거북하고 지루한 느낌은 (분명히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구구절절 옳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어디서 오는 것일까?
<로마서>를 다시 읽어보고 찾아낸 이유는 이거야.
내가 성경의 전체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판단했었다는 것. 처음 읽을 때 ‘믿음’을 강조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 <로마서>의 구성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신약 전체를 두고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됐어.
4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구체적 사실들을 들고, <로마서>에 와서는 ‘그런즉 믿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해했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 나는 여전히 ‘<로마서>의 믿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정언(正言)’을 강조하면 할수록 교조화되고 공허해지기 쉽지.
십계명이 옳은 말인 줄 누가 모르나? 문제는 그걸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를 강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고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야.
당연하고 옳은 것을 백번 강조하는 것보다 작고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한 번의 실천이 더 중요해.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봐.
그럼 믿는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러 번 얘기했듯이 나는 신이(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걸 믿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시작이고 끝이며, 이 세상의 유일한 실제이고, 내 존재의 근원이라는 걸 믿어.
물론 내가 믿는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는 않아.
어떤 사람들은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믿고, 또 ‘불교’ ‘힌두교’ 기타 여러 이름으로 믿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이 모두 하나의 대상을 믿고 있다고 생각해. 누가 뭐라고 이름하건, 이 세상의 유일한 실재는 하나님 하나뿐이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있다고 말해야 할 거야.
그리하여 나도 하나님의 일부이고, 너도 하나님의 일부이고, 우리 모두, 더 나아가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일부인 거지.
옛날 성 프란체스코가 “Brother Sun, sister Moon!”이라고 자연을 노래한 것도그런 깨달음의 결과 아니겠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부서져 가는 것은
다정한 모래사장이 부러워서가 아니어요
박력 있는 바위해변이 좋아서도 아니어요
내가 이렇게 한껏 몸을 일으켜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싫어져서가 아니어요
당신은 바다 나는 파도
내가 이렇게 한껏 모양을 뽐내며 나를 주장하는 것은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부서져 당신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서
나는 파도 당신은 바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내가 쓴 <파도의 변명>이라는 시야. 바다와 파도에 빗대어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노래한 시지.
파도가 무슨 짓을 해도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이 용인하는 일이고, 인생이라는 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내용이지.
믿기만 한다면! 우주의 모든 작용이 하나님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수만 가지 파도의 일렁임일 뿐이라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 하나님의 뜻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믿음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것은 맞아. 문제는 그 믿음이 ‘믿어라!’ 하고 강조(강요)한다고 생기지는 않는다는 거지.
믿음은 사랑이야. 성 프란치스코가 해와 달까지 형제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해와 달이 하나님의 은혜고 분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원수도 하나님의 조화이고, 나의 형제이고, 그러므로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나는 생각해.
얘기가 중언부언 길어지는 것 같으니 서둘러 마무리를 할게.
우리 인간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언 명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일을 종교가 해줬으면 하고 나는 바라는 거지. 요즘 기성 종교가 그런 점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고...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아냐. 하나님의 바다에서 존재하면 어차피 바다로 돌아가게 마련이지만, 존재 근거가 없는 맹물은 이리저리 흐르다 증발되어 사라지고 말지.
바닷물이냐 맹물이냐를 가르는 기준은 간단해. 소금의 짠맛이 있느냐 없느냐?
얼핏 바닷물처럼 보이는 맹물의 가짜 믿음을 어떻게 가려야 할까?
‘사랑’이 그 척도가 아닐까 싶어. 나를 사랑하고,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실천을 통해 그런 사랑의 확장을 경험하는 게 믿음의 길 아닐까?
사랑하는 동생!
군대 있을 때 편지한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처음이지?
편지라 일상적으로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썼지만, 막상 써놓고 보니 약간 쑥스럽네? 직접 말로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진심을 전할게.
요즘 어머니 변하신 얘기 했나?
아침마다 안부전화를 드리는데 며칠 전 갑자기 ‘아들, 사랑해.’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야.
‘아니,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했더니 ‘그냥 그러기로 했다.’고 하셔. ‘저도 사랑해요.’라고 얘기했는데,약간 어색해하는 나 자신에 조금 놀랐어.
사랑한다는 말을, 어머니한테도 하기가 쉽지 않다니... 행동도 아니고 말 뿐인데도...
참, 나란 남자...!
네 말대로 좀 더 겸손해지도록 노력할게.
부족한 것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지금보다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게.
네 말을 따라서 <로마서>를 한 번 더 읽었다는 것은 전보다는 그만큼 나아졌다는 증거 아니니?
너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서 너와 세상과 하나님이 하나로 체험되는 그런 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랄게.
진리는 변하지 않고 항상 있지. 다만 우리가 그걸 깨달을 때까지 약간 시간이 필요할 뿐.
God bless you!!!
교회를 나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믿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오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