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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27.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44; 섹스란 무엇인가?


오늘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섹스’에 대해 말해보려고 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어서 ‘섹스(Sex)’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어색하게 들리는데, 굳이 말하자면 ‘성교(性交)’ ‘성행위’ 정도가 될 거야. 워낙 복잡한 주제라 제대로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되도록 간략하게 얘기하도록 할게.


섹스에는 세 가지 측면이 혼재되어 있어. 생식과 쾌락, 그리고 사랑이지. 생식, 다시 말해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섹스는 점점 그 의미와 인기가 퇴색되고 있으니까 넘어가기로 하자. 미래 어느 땐가는 ‘어? 아기를 낳기 위해 섹스를 했어?’라고 말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몰라.


쾌락을 위한 섹스는 말 그대로 성적 즐거움을 얻기 위한 섹스를 말하지. 흔히 식욕과 성욕, 그리고 명예욕을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는데 성욕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쾌락을 제공해. 요즘 먹방이 유행이어서 온갖 채널을 도배하다시피 하는데, 이는 먹는 즐거움을 보여주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식욕의 전시, 상품화라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고 봐. 일종의 ‘식욕 포르노’인 셈이지. 즐거움이라는 게 아주 예민한 감각이어서 과장하거나 고정화시켜버리면 바로 부패하고 변질되고 말거든.


먹방이 유행하는 것은 현대가 쾌락의 시대라는 증거야. 섹스 역시 쾌락을 위한 섹스가 대세라는 말이지. 쾌락은 나의 감각이고 내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성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은 모두 허락돼.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식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나의 성적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섹스의 대상이 되지. 다양한 종류의 자위도구가 개발되고 성능 좋은 섹스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흐름에서 당연한 결과야. 쾌락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거지.


그러면 이러한  쾌락의 추구가 사랑으로서의 섹스에도 기여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야.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쾌락과 사랑은 그 방향이 반대거든. 육체적 감각적 쾌락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사랑이라는 행위는 (나에게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점점 다른 사람으로 확대되는 성질이 있어. 쾌락의 섹스가 번성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랑의 섹스가 어려워진다는 뜻이라는 거지. 요즘 혼밥 혼술 등 혼자 하는 여러 가지가 유행하는 것은 그런 흐름을 반영해. 이대로 간다면, 어쩌면 조만간 혼자 하는 ‘혼섹’이 대세가 될지도 모르겠어.


“에로티즘이란 타자로 향하는 운동이다.”


<제2의 성>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말이야. 편의상 이 말을 바꾸어 볼게. 


“사랑으로서의 섹스란 상대에게로 향하는 운동이다.”


쾌락의 추구가 상대에게서 나에게로 오는 것이라면, 사랑의 추구는 나에게서 상대에게로 확산되는 경험이지. 물론 이 두 가지 양상은 나눠지지 않고 붙어있어. 그래서 헷갈리고 혼돈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되기 때문에 잘 살펴봐야 해. 사랑을 잃어버린 섹스는 나를 ‘나만의 쾌락’이라는 틀에 갇히게 만들어. 점점 사회와 유리된 자만의 세계에 몰두하게 되는 거지. ‘자폐’에 빠지는 거야.


사랑이란 무엇인가? 보봐르의 말을 다시 빌어쓰면 ‘사랑이란 세상으로 향하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의 상대,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일터, 나의 나라로 확대되는 운동.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의 목표점이지.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라는 이탈리아 영화감독이 있어. <테오레마> <마태복음> <살로, 소돔의 120일>등을 만든 문제적 감독인데, 에로티즘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명제를 충실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나와. 자유분방한 섹스, 동성애, 근친상간, 집단성교, 수간 등은 물론이고 신체 훼손과 배설물 먹기 등 엽기적인 행위도 보여지지. 모든 종류의 금기에 도전하는 거야. 금기를 넘어서야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나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같은 심리학자들이 성적 해방이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자유도 없다고 보는 것이나, 1960,70년대 열풍처럼 불었던 성해방과 뉴에이지 운동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어.


문제는 여기부터야. 사랑이 확산의 에너지이고 섹스가 그 확산의 구체적 행위라고 할 때, 사랑으로서의 섹스를 어느 선에서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지. 사실 우리가 흔히 행하는 신체접촉들- 악수, 포옹, 가벼운 입맞춤, 하이파이브 등-은 일종의 ‘제한된 섹스’인 셈이야. ‘여기까지!’ ‘이 선은 넘지 맙시다!’ 하는 약속인 거지. ‘육체적인 소통’ ‘서로의 몸이 서로 연결되는 것’ ‘너와 내가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을 ‘섹스’라고 할 때, 그것의 가장 최소화한 형태로 양식화시킨 게 악수야. 다시 말해서 악수란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신체적 접촉은 여기까지만 하자.’라는 신호란 말이지.


그렇다면 일반적인 개념의 섹스, 구체적인 성행위는 어떤 상대와 어떻게 나눠야 할까? 물론 정답은 없어. 전적으로 그의 선택에 달린 거지. ‘나는 사람이 싫다. 나의 고양이만을 사랑하겠다.’고 해도 그의 선택이고, ‘나는 한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겠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해도 그의 선택이야.


얘기가 길어지지 않게 나의 결론부터 말할게. 앞에서 보봐르의 말을 차용해서 ‘섹스란 상대에게로 향하는 운동’이라고 말했었지? 그 말을 다시 풀어보면 ‘섹스란 상대와 연결되고자 하는 구체적 행위’이고, ‘상대와 육체적으로 합해져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 ‘나’가 ‘너’와 합해져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야. 그건 사회적인 계산법이고 ‘1+1=2’라는 수학적 사고방식이지. 하지만 섹스는 ‘1+1=0’을 경험케 하는 새로운 세계야.


모든 것의 시작은 ‘나’야. 내게서 성적 욕망이 일어난다. 그 욕망은 ‘사랑을 원하는 운동 에너지’야. 그 에너지가 자신에게로 향하면 자위가 되고, 내 앞의 상대에게 향하면 섹스가 되지.

눈빛의 마주침, 가벼운 터치, 피부를 스치는 손길, 부드러운 키스...

강력한 쾌감이 나를 압도하지만 절대로 상대를 잊어버리면 안 돼. 나의 감각에만 집중하면 자위나 마찬가지가 되고 ‘1+1=2’의 수학이 돼. 나의 쾌락과 감각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상대에게 집중해야 돼. 섹스란 ‘상대와 하나가 되는 운동’이니까. 그렇게 하나가 되고, 어느 순간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도 사라져 ‘없음.’ ‘무’를 경험하는 놀라운 기회니까. ‘1+1=0’을 깨닫는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니까. 일반적으로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그 기적의 순간.


물론 섹스가 항상 그런 기적을 제공하지는 않을 거야. 비 개인 하늘에 항상 무지개가 뜨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섹스는 상대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맨 처음의 욕망, 상대와 하나가 되려는 에너지를 잊으면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사라져 버려. 다시 한번 강조할게. 사랑으로서의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와 하나가 되려는 에너지’야. 


“통하였느냐?”


통한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뜻이지. 섹스에서 통한다는 말이 중요한 것은, 섹스는 몸과 몸이 만나는 육체적 행위이기 때문이야. 몸과 몸이 통함으로써, 나와 상대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됨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돼.


서로 주고받는 눈빛으로 마음이 통하고 마주 잡은 두 손으로 몸이 연결되기 시작해. 어느 순간 옷을 벗게 되는데, 옷을 벗는다는 것은 사회적 틀과 허울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자연의 나로 존재한다는 뜻이야. 나의 알몸과 상대의 알몸이 밀착되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이 생기지. 백 마디 말로 약속하는 사랑보다 이 한 번의 알몸이 훨씬 강력한 사랑의 증거가 돼.


그렇게 통해서 하나가 되면, 사랑의 섹스를 통해서 일체감을 경험하게 되면 그다음 대상부터는 굳이 섹스가 아니더라도 연대가 가능해. 악수만으로도 사랑을 하고, 포옹으로 격하게 감정을 표현해도 만족해. 멀리 있다면 ‘사랑한다’고 말만 해도 진심이 되고, 지구 반대편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도 연대감이 생겨. 나는 이미 섹스를 통해 구체적인 일체감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의 일상이 모두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거야. 나-너-우리-세상의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거지.


정말이냐고? 사랑으로서의 섹스가 정말 그렇게 멋진 거냐고? 그런데 왜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 험하고 거칠기만 하냐고?


간단히 두 가지만 말할게. 

첫째, 쾌락으로서의 섹스가 유행하고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것. 사회적 추세와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는 섹스의 태도는 쾌락이 섹스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먹방을 보면서 ‘나도 저것을 저렇게 먹어봤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거기에는 내가 없어. 가짜 이미지에 홀린 허깨비 나만 있을 뿐이지.


둘째,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섹스도 불완전하기가 쉬워. 항상 완전한 통함, 만족한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는 없다는 거야. 섹스도 일종의 상대가 있는 게임이니만큼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지. 더군다나 우리는 섹스를 구체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에 미숙한 채로 실전에서 헤매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갈등이 없는 편한 길, 섹스 로봇의 길로 가버리는 거지. 그것은 쾌락의 길이기는 하지만 세상과는 단절되는 길이야. 내 쾌락을 위해 남에게 폭력적으로 되는 길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딸!

일종의 ‘성교육 개론’의 서론인 셈인데 도움이 됐니? 너무 원론적인 얘기에 그친 감이 없진 않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자세히 얘기하자면 끝이 없으니까. 또 기회가 있겠지.


언젠가 편지(딸에게 쓰는 편지 6;여자는 여자다)에서 말한 대로, 아빠는 중고등학교에서 여러 입시과목보다 요리법과 대화법과 성교육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게 영어 수학보다 3000배는 더 중요해.


그러나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는 별로 없어. 그나마 요리는 학원도 있고 실습할 기회도 쉽게 생기지만 대화법이나 성교육은 전혀 받지 못해. 바로 실전 투입이야. 요약본으로 핵심만 정리해 줄게. 

대화법에 대해서는 ‘딸에게 쓰는 편지 41; 집안일의 정석’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나?


대화의 법칙.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다. 잘못은 인정하고, 모르는 것은 묻는다.’


이것만 기억하고 지키려고 노력해도 기본적인 대화는 유지할 수 있을 거야.


섹스란 상대와 통하려는 운동 에너지이다.


통하려면 나를 잊으면 안 돼.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쾌락을 놓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1+1=2). 그러한 나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집중해야지. 상대의 반응, 쾌락에 유념하면서 보조를 맞춰야 해. 그러면서 하나가 되어가는 거지(1+1=1). 하나를 넘어서서 ‘나도 너도 없음’의 세계를 보면 금상첨화겠지만(1+1=0)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 통하려는 마음만 잊지 않으면 돼. 그렇게 살아가는 거니까. 그러면서 점점 완성을 추구해 가는 것, 그게 인생이니까.


  -- 딸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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