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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Oct 12. 2020

과거 영광·역사 숨쉬는 아랍 영웅 살라딘의 요새

<66> 이집트의 카이로 성채

십자군 원정대 방어 위해 건축

여러 이슬람 사원·궁전 등 세워

600년 넘게 통치자 거주지 역할

프랑스·영국에 수모 당하기도

군사·경찰박물관 등으로 변모

                                                        

카이로 성채 전경. 사진=픽사베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랍 지역 최대의 도시로 7세기부터 20세기의 등록 기념물이 최소 600개나 있는 고도(古都)다. 카이로 남동쪽의 무카담 언덕에 있는 카이로 성채(성과 요새를 아울러 이르는 말)는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1137~1193, 살라딘)가 방어를 위해 세운 요새다. 그 후 이곳은 여러 이슬람 사원과 궁전 등이 세워졌는데, 1874년 케디브 이스마일 총독이 압딘 궁전으로 정부를 옮기기 전까지 600년 넘게 통치자의 거주지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프랑스와 영국에 점령당한 전쟁사가 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곳에 3년간 머물렀으며, 1882년 영국군은 이집트를 점령한 다음에 1946년까지 주둔했다.


작자 미상의 화가가 그린 살라딘의 초상화. 사진=대영 박물관 소장


카이로 보호 위해 살라딘이 1183년 건설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슬람 왕조로 7세기부터 북서아프리카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969년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지리적으로 외세 침략에 취약한 알렉산드리아 대신 남쪽 내륙에 있는 카이로에 터를 잡았다. 파티마 왕조의 장군 조하르 알루미는 당시 바그다드에 대적할 만한 새로운 수도로 ‘승리자’라는 뜻의 카히라(Kahira)를 건설했는데, 이는 카이로(아랍어로는 Al-Qahirah)의 어원이 됐다. 카이로는 나일강 삼각주 델타와 사막이 만나는 곳에 자리해 있어 이슬람 세계의 중요 도시로 성장했다.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살라딘은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카이로를 보호하기 위해 1176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 성채를 세웠다. 성채 안에는 왕궁, 군사 사령부, 정부 관청 등이 지어졌다. 살라딘이 축조한 성벽은 그가 죽고 나서도 1238년까지 계속 지어졌다. 카이로의 전성기는 1250년대에 아이유브 왕조를 대체하는 맘루크 왕조의 출현과 함께 왔다. 맘루크 왕조는 16세기까지 약 250년간 권력을 유지했는데, 술탄들은 성채에 많은 수의 건물을 더 웅장한 양식의 건물로 대체했다.


카이로 성채 전경.사진=amazontouregypt.com


179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


1517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를 무너트리고, 이집트를 맘루크족이 이끄는 오스만의 속주(屬州)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성채에는 모스크, 관문, 건물 등이 새로이 지어졌다. 1650년대에 성채 안에 거리, 주택, 상점, 시장, 공공 목욕탕이 생겨나며 주거 지역으로 발전했다. 1798년 프랑스는 전략적 요지인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어 영국을 견제하고자, 나폴레옹을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해 5월 19일 나폴레옹은 3만8000여 병력과 350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집트 원정을 떠났다. 나폴레옹은 두 달 만인 7월 21일 카이로에 진군해 맘루크 군과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성채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해 8월 1일 영국의 넬슨 제독이 알렉산드리아 근처 아부키르 만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와 나일강 전투 승리를 시작으로 프랑스군은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 줄리앙 요새 포위전, 카이로 포위전, 알렉산드리아 포위전에 잇달아 패배하면서 이집트를 떠나게 됐다.


1892년 카이로 성채 전경. 사진=pastpictures.org


1882년부터 1946년까지 영국군 주둔지로


프랑스에 점령당한 이집트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1805년 오스만 제국은 무함마드 알리(1769~1849)를 이집트 총독인 파샤(pasha·오스만 제국 문무의 고급관료에 주어진 명예적인 칭호)에 임명했다. 알리는 새 거리를 만들고 성채 안의 낡은 건물들을 다시 세우며 카이로를 재정비했다. 당시 세워진 건물 중 하나가 1857년 완공된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다. 이곳은 터키의 블루 모스크에서 외형을 따왔는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던 알리가 오로지 술탄만이 세울 수 있다는 두 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첨탑)를 지음으로써 술탄의 권력에 도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알리는 사후에 이 모스크에 묻혔다. 알리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케디브 이스마일(1830~1895) 총독에 의해 통치자의 거주지가 1874년 압딘 궁전으로 이동하고 나서 성채는 그 역할을 멈췄다.


1841년 화가 오귀스트 쿠더가 그린 무하마드 알리의 초상화. 사진=베르사유 궁전 소장


1870년대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이권에 영국이 개입했다. 1879년 이집트의 독립 운동가인 아라비 파샤(1841~1911)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은 1882년 군대를 파병해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 후 영국군은 이집트를 점령해 1946년 물러날 때까지 성채에 주둔했다. 성채 아래쪽에는 당시 영국군이 사용했던 막사가 남아 있다. 이후 1983년까지 이집트군이 성채를 사용했다.


성채는 언덕의 지형을 따라 세워져 불규칙적인 형태로 동서로 폭이 가장 넓은 곳은 약 800m이고, 남북으로는 600m이다. 이곳에는 칼라운 모스크,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등의 이슬람 사원과 이집트 국립군사박물관, 알가우하라 궁전 박물관, 캐리지 박물관, 경찰 박물관 등이 있다. 출입구는 남동쪽에 알가발 문과 서쪽에 알가디드 문이 있다. 북동쪽에 망루가 있다. 성채는 197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카이로 성채는 전쟁을 끝내고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서 빛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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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01012/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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