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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Jan 15. 2020

‘민간인 무차별 폭격’ 스페인 내전의 상처 기억하다

<5> 스페인의 게르니카

히틀러와 무솔리니 지원 공군 폭격기 동원 게르니카 폭격
인구 7000명 중 1600여 명 사망

 
폭격으로 고사한 자유 상징 참나무 그루터기로 보존
전쟁 고발한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 원화 복제해 주택가 타일벽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마을의 중심부인 푸에로 광장에서 외곽 방향에 있는 한 주택가의 담벼락에 원화를 그대로 복제한 타일벽화로 전시돼 있다. 사진=픽사베이


스페인 내전(La Guerra Civil Espanola, 1936~1939)은 1936년 스페인 제2공화국에 인민전선 내각이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벌어진 전쟁으로 스페인 현대사의 가슴 아픈 기록이다. 이런 스페인 내전의 전쟁사를 도시 그 자체의 건축물로 보여주는 공간이 있다. 바로 게르니카다. 그곳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살아 있다.


1937년 4월 26일 벌어진 비극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야 주에 속한 게르니카는 1366년 텔로 백작이 루모 지역에 둘러싸인 자치령으로 건설했다. 1882년 루모 지역과 통합한 후에 정식 명칭이 게르니카-루모로 정해졌지만 보통 게르니카라고 부른다. 바스크 민족의 중심지인 빌바오에서 차로 40여 분 떨어진 거리에 있다.

1936년 2월 사회당과 좌익 공화파, 공산당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의 집권에 반대해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국민당은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프랑코 장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반면 공화국 정부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데 그쳤고 영국과 프랑스 등은 불간섭 정책을 취했다.

바스크 정부는 단독적인 군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화당 간 다툼은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공화국 정부의 전복을 꾀한 프랑코 군대는 스페인 북부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요 근거지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는 바스크 민족에게 게르니카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크 민속박물관 옆 공터에 게르니카 폭격으로 고사한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존하고 있는 모습. 사진=Leemage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30분, 게르니카에 폭탄이 재앙처럼 내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독일 공군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기 55대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지휘 아래 게르니카에 2시간 넘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250㎏ 고폭탄과 50㎏급 폭탄, 1㎏ 소이탄까지 무려 24톤을 퍼부었다.


평화롭던 게르니카는 죽음의 도시로 바뀌었다. 인구 7000여 명의 마을은 불타고 무너졌다. 마침 휴일이어서 시내 중심가에 나온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속절없이 숨을 거뒀다. 사망자만 1600여 명(당시 바스크 정부 추산)이고 900여 명이 부상했다. 특히 성인 남성들이 전선에 나가 있어 피해자는 주로 민간인 여성과 노약자들이었다. 전체 건물의 4분의 3 정도가 파괴됐다. 주요 무기고였던 운세타 사와 타예레스 데 게르니카, 공화당의 주 청사였던 카사 데 준타스 등도 파괴됐다.


정규군이 민간인을 직접적 공격 대상으로 삼아 무차별 폭격을 한 것이다. 프랑코의 요청으로 폭격을 가한 나치 공군은 게르니카를 전격전의 첫 전술적 시험무대로 삼아 독일 공군 최첨단 무기의 성능을 실험했다. 게르니카 폭격은 군사 전술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공화파 지역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민중의 저항 의지를 꺾는 것이 목적이었다.


프랑코의 반란군은 게르니카 외에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등을 공습했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프랑코의 반란군이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면서 끝났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40만 명이 사망했고 60만 명이 다쳤다. 50만 명은 탄압과 보복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36년 동안 독재자로서 스페인을 지배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탄 투하로 페허가 된 게르니카의 모습. 사진=Keystone


폭격으로 고사한 ‘게르니카의 나무’


게르니카는 중세시대부터 참나무의 고장으로 불렸다. 특히 민족주의와 자유를 상징하며 ‘게르니카의 나무’라 불리는 참나무 아래에서 바스크 민족 지도자들이 지방의 중요한 일을 결정했다. 이 참나무가 있는 장소가 바스크 정부의 의회인 셈이다. 첫 번째 참나무가 19세기 중반에 생을 다한 후 새로운 참나무를 심어 그 상징성을 계승했다. 하지만 이 나무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고사했다. 바스크 민속박물관 옆 공터에는 그날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죽은 나무의 그루터기가 보존돼 있다.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의 회화 작품 ‘게르니카’(Guernica, 1937)는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작품의 원작은 1992년부터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에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있어야 할 장소는 다름 아닌 게르니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게르니카의 중심부인 푸에로 광장에서 외곽 방향에 있는 한 주택가의 담벼락에 원화를 그대로 복제한 타일벽화로 전시돼 있다. 실제 작품보다 크기가 작지만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준다.


1998년 개관한 게르니카 박물관

1988년 게르니카 폭격 50주년을 기념해 바스크의 조각가 에두아르도 치이다가 제작한 평화기념비가 세워졌다. 1997년 60년을 맞아 당시 독일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이 한 잘못을 사죄하는 편지를 게르니카의 생존자들에게 보냈다. 이듬해인 1998년 독일 의회는 독일 군사기지에서 콘도르 군단 소속 군인들의 이름을 제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에 게르니카 박물관이 개관했고 2002년에 이르러 스페인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게르니카 평화박물관으로 변모했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은 참사 당시 게르니카 상공을 날던 독일 전투기를 모형으로 재현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포탄들을 그대로 모아 전시하고 있다.

80년 전 공습으로 폐허가 됐던 게르니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게르니카 곳곳의 건축물들은 아픈 전쟁사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일깨워주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7월 29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729/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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