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상아트 Jan 16. 2020

이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조약식이 열렸다

<6>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는 절대왕정을 누렸고

나폴레옹은 전 유럽과 전쟁했고
빌헬름1세는 獨 황제 대관식을 열었다


베르사유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는 거울의 방 전경. 직사각형으로 전체 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이다. 사진=픽사베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사를 모두 함축하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근대역사의 중요한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이후 1871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거행된 것은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1662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50년 걸친 대공사 끝에 탄생


베르사유 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1601~1643)의 사냥용 별장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절대왕권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1662년 증축을 시작, 1715년까지 50년여에 걸친 대공사 끝에 대궁전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려 2만5000~3만6000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됐다.


둘레가 20㎞에 달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건축가 르보가 설계하고 정원 계획가인 르노트르가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고 왕실 화가인 샤를 르브룅이 실내 장식을 했다. 강렬한 이성주의와 논리적인 미감이 특징이며 수학과 기하학을 바탕으로 구도의 절대적 비례성을 강조했다.    


루브르 궁전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루이 14세의 초상화. 루이 14세는 72년이나 왕좌에 앉아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사진=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 축조 비용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으로 프랑스 국가 재정은 이미 루이 14세 말년에 위기 양상을 보였다. 루이 14세는 1688년에서 1697년까지 유럽의 신성로마제국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웨덴, 사보이아 공국 등이 결성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과 전쟁을 벌였다.


루이 14세가 1701년부터 1714년까지 참여한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났을 당시 프랑스 정부 부채는 20억 리브르(1795년까지 사용된 프랑스 통화 단위)에 달했다. 이는 18세기 프랑스 정부를 괴롭힌 만성적 재정 악화의 원인이 됐으며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1871년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에 즉위하고 독일제국 수립을 선언하고 있다. 사진=비스마르크 뮤지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의 대관식 열린 이유는?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한다. 직사각형으로 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이다. 정원을 향해 17개의 창문이,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있다. 이곳에서 독일 제국이 탄생했으며 반세기도 못돼 몰락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상한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프로이센도 예외는 아니다. 1806년 10월 27일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베를린 궁전까지 향했다. 당시 나폴레옹에게 당한 굴욕은 프로이센에는 언젠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이 끝나자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준비에 착수했다.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최대 과제로 삼은 반면 프랑스는 통일 독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했다. 프랑스는 1870년 7월 14일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고 7월 19일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임을 주장하면서 맞대응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됐을 뿐 아니라 전쟁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참패했다. 특히 퇴각한 프랑스 군은 9월 1일경 스당에서 프로이센 군에 포위돼 이튿날 항복했다. 프로이센군은 황제 나폴레옹 3세를 포함해 10만4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스당 함락 소식과 함께 파리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제3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전쟁은 6개월을 더 끌다가 막을 내렸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승리한 프로이센 군사령부는 베르사유 궁전에 주둔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영광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은 종전을 선포하고 독일 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 1세(1797~1888) 대관식을 열었다. 이는 순전히 나폴레옹 1세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고 앙금은 1차 대전 종전 때까지 이어졌다.


1919년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있는 모습. 사진=redmonk.com


1차 대전 종전 조약 장소를 베르사유 궁으로 정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회의로, 1919년 1월 18일 시작돼 1920년 1월 21일 종결됐다.


회의의 가장 큰 결실이 ‘베르사유 조약’이다. 이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11시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1차 대전의 평화협정이다.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해 조약 서명 장소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으로 선택한 것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에 따른 치욕적 역사에 대한 수치심을 씻고 독일에 대한 복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목표는 1차 대전 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항구적인 평화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책임을 독일에만 전적으로 묻고 군사적·산업적으로 독일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해 독일에 가혹한 처결을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치가 부상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공식적 원본은 프랑스 외무부 서고에 보관돼 있었으나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히틀러의 명령으로 빼앗겨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은 세계적 관광지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 대통령과 여러 지도자들은 이곳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외교 사절 환영회를 연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사를 간직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8월 5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805/1/BBSMSTR_000000100082/view.do


매거진의 이전글 ‘민간인 무차별 폭격’ 스페인 내전의 상처 기억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