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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21. 2020

3300년 모래바람 속에 빛난 세계 최초 화해의 흔적

<30>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

람세스 2세 카데시 전투 승리 기념
기원전 1257년 세워진 석굴사원
세계 최초 평화조약 ‘카데시 조약’
이집트·히타이트 간 체결 후 건설
모래 속 파묻혀 있다 1813년 발견
1960년 아스완댐 건설로 수몰 위기
유네스코 노력으로 65m 위로 이전

                                                       

아부심벨 신전 전경. 사진=www.britannica.com


이집트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약 280㎞ 떨어진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은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기원전 1303~1213·람세스)가 카데시 전투 승리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원전 1257년 건설한 석굴사원이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인 카데시를 두고 일대 격전을 벌였는데,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한다. 카데시 평화조약문은 세계사에 기록된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아부심벨 신전을 비롯해 라메세움 신전, 카르낙 신전과 옛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도 남아 있다.


아부심벨 신전 전경. 사진=agoda.com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대립

나일강변의 비옥한 토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집트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다. 기원전 3150년경 상·하 이집트를 메네스 왕이 통일하며 이집트 왕국을 건설했다.

31개 왕조가 기원전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으로 구분된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신왕국 시대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카데시 등이 이집트 영토였다. 하지만 이집트를 위협하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등 강력한 국가가 잇달아 나타났는데 그중 히타이트는 흑해와 에게해,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는 아나톨리아를 기반으로 우수한 제철 기술을 보유한 나라였다.

기원전 2000년경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히타이트인들은 기원전 1700년경 쿠사라(Kussara)를 수도로 정하고 주변국들과 싸우며 세력을 넓혔다. 그 후 히타이트는 하투사(Hattusas·현재 터키의 보아즈칼레)로 수도를 옮기고 아나톨리아 일대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이집트가 제18왕조에서 제19왕조로 바뀌는 혼란기에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스 2세(재위 기원전 1315∼1290·무와탈리스)는 수도를 하투사에서 남쪽인 타르훈타사로 옮기고, 이집트 영토 중 일부인 카데시를 점령한 뒤 히타이트 영토로 귀속시켰다. 이집트는 제19왕조가 안정되자 카데시를 되찾고자 했으며, 세티 1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람세스와 무와탈리스의 전쟁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아부심벨 신전 내부에 그려져 있는 카데시 전투 장면. 람세스 2세가 전차를 타고 활을 쏘고 있다. 사진=egyptopedia.info


기원전 1274년 벌어진 카데시 전투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기원전 1274년(1286년에 벌어졌다는 설도 있음) 카데시에서 격돌한다. 람세스는 신의 이름을 딴 아몬(Amon)·라(Ra)·프타(Ptah)·세트(Seth) 사단 등 각 5000여 명으로 구성된 4개 사단의 보병 2만 명과 전차 2500대의 부대로 원정길에 나섰다. 히타이트는 무와탈리스가 지휘하는 3만5000명의 군사와 3500대의 전차 부대로 이집트군을 상대했다.


승패를 좌우한 것은 전차 부대였다. 이집트 전차에는 두 명이 탔는데 한 명은 말을 몰고 다른 한 명이 방어하면서 화살을 쐈다. 반면 히타이트의 전차에는 세 명이 타서, 한 명은 말을 몰고 두 명이 각각 방어와 공격을 전담했기 때문에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동 속도가 느렸다. 이에 히타이트군은 기습 공격으로 이런 단점을 만회하고자 했다.


람세스가 오론테스 강을 넘어 카데시로 진격하기 전, 미리 도착한 히타이트군은 두 명의 스파이를 보내 히타이트군이 카데시 북쪽에서 오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에 속은 람세스가 아몬 사단을 이끌고 오론테스 강을 넘어 카데시로 진격하자 히타이트군은 이집트의 아몬 사단 뒤에 있던 라 사단을 급습했다. 측면을 기습 공격당한 라 사단은 전투태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너지고 앞서가던 아몬 사단도 혼란에 휩쓸렸다. 


람세스는 큰 위기에 처했지만, 무와탈리스가 지나친 신중함으로 전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는 동안 이집트군 후속 병력이 합류하면서 히타이트는 초기 우위를 잃었다. 람세스가 히타이트군의 방비가 무너진 틈을 타 돌격 명령을 내리면서 히타이트군은 전면 붕괴로 치달았다. 오론테스 강의 동쪽에 본진을 두고 총지휘하던 무와탈리스는 카데시 성 안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병력 피해가 컸던 이집트군은 성을 공략하지 않고 퇴각했다.


1906년 터키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카데시 평화 조약문으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돼 있다. 사진=egyptopedia.info


무와탈리스가 병사한 뒤 아들인 무르실리스 3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삼촌인 하투실리스가 기원전 1267년경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끌어내리고 하투실리스 3세로 등극했다. 무르실리스 3세는 이집트로 망명해 왕위를 되찾는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시리아까지 치고 들어오면서 하투실리스 3세는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전쟁이 끝난 지 16년 후인 기원전 1258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상호인정·상호불가침·호혜평등 등이 담긴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체결해 각각 상형문자와 설형문자(그림문자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 단단한 갈대 줄기나 철필로 점토판에 쐐기형의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는데 그 모양이 쐐기와 같다고 해서 설형문자란 이름이 붙었음)로 적은 평화조약문을 나눠 가졌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해 약탈하지 않는다.”


아부심벨 신전 입구에 있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동상. 사진=www.britannica.com


수많은 건축물 세워 업적 과시

조약에 명시된 대로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지중해 해양 민족들의 공격을 받고 사실상 패망하는 기원전 1180년 무렵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히타이트와의 평화협정으로 람세스의 치세(잘 다스려져 화평한 세상)는 무려 60여 년이나 이어졌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칭송받는 람세스는 평화 속에서 신전과 석상 등 수많은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세워 업적을 과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부심벨 신전이다.

거대한 천연 사암층을 뚫어 대신전과 소신전을 나란히 세워 남성과 여성 등 창조의 근원을 표현한 이 신전의 대신전 전면에는 높이 22m의 람세스의 석상 4개가 조각돼 있다. 신전 정면은 높이 32m, 폭 38m, 안쪽 길이 63m로 카데시 평화조약문은 입구에 복원돼 있으며 내부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의 승리를 칭송하는 부조가 있다. 대신전에서 90m 떨어진 소신전은 왕비 네페르타리를 기리는 신전으로 정면 높이 12m, 폭 26m, 안쪽 길이 20m이다. 입구에 10m 높이로 왕의 입상 4개, 왕비의 입상 2개가 조각돼 있다.


아부심벨 신전 전경. 사진=egyptopedia.info


아부심벨은 오랫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역사에서 잊혔다가 1813년 페트라(고대 나바테아 왕국의 중심 도시. 현재 요르단 수도인 암만에서 262㎞ 떨어진 남서부 내륙 사막지대에 위치한 도시유적)를 발견한 스위스 학자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발견 당시 기술로는 수작업으로 모래를 제거해야 했기에 부르크하르트는 발굴을 단념했다. 그 후 1817년 이탈리아의 모험가 조반니 벨초니가 많은 인부와 자금을 투입해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는데, 당시 발굴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 소년의 이름으로 따서 아부심벨이라고 명명했다.

1831년 영국의 로버트 헤이가 람세스 동상의 발밑까지 모래를 제거했지만 1850년대 다시 모래 속에 파묻혔고 1909년 프랑스의 가스통 마스페로의 지휘 아래 신전을 덮고 있던 모래가 모두 제거됐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부심벨은 1960년대 이집트 정부가 나일강 나세르 호수에 아스완 하이 댐 건설을 계획하면서 인근 수위가 60m 높아져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네스코의 노력으로 세계 50여 개국에서 3600만 달러(한화 기준 약 416억 원)가 모금된 덕분에 1968년 신전은 1036개로 분리돼 원래 자리에서 65m 위로 옮겨졌다. 오늘날 아부심벨 신전은 33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카데시 전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1월 20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120/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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