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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24. 2020

650년 왕가의 유산…정원엔 평화 담은 ‘작은 영광’이

<31>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

‘아름다운 샘’ 뜻…1642년 건설
1683년 오스만군에 의해 파괴
마리아 테레지아, 왕실로 재건
왕위계승전쟁·7년전쟁 이후
평화 기념 ‘글로리에터’ 세워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왕가 몰락
오스트리아 공화국 박물관으로

                                                        

쇤브룬 궁전 전경. 사진=www.panoramatours.com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1273년 루돌프 1세(1218~1291)를 시작으로 1918년 카를 1세(1887~1922)가 왕위에서 물러나기까지 65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한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이 왕가가 여름에 거주한 궁전인 쇤브룬 궁전이 있다(겨울에는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거주했다).   


16세기 사냥터로 처음 만들어져

신성로마제국은 962년 오토 1세(912~973)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에서 시작된 제국이다. 오스트리아 빈은 15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569년 막시밀리안 2세(1527~1576)는 쇤브룬 궁전의 터인 카터부르크 지역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으로부터 매입한 후 이곳을 사냥터로 쓰기 위해 동물 사육장과 오두막을 만들었다.

쇤브룬(Schonbrunn)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1557~1619)가 사냥하면서 샘터를 발견했을 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샘인가(Welch’ schoner Brunn)!”라고 말한 일화에서 궁전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당시 지어진 건물들은 1605년 빈에 침입한 헝가리인들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페르디난데 2세는 이곳을 복구하지 않다가 1637년 그의 죽음으로 두 번째 부인인 엘레노라 곤자가의 거처가 되면서 1642년에 궁전이 지어졌다.


작가 미상의 1683년 오스만 튀르크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의 제2차 빈 공방전. 최대 규모의 기병전이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사진=www.kampaniawrzesniowa.pl


오스만 투르크의 제2차 빈 공방전으로 파괴


1683년 7월 17일 오스만 투크르의 실권자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1635~1683)는 헝가리의 개신교도들이 오스트리아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14만 대군을 이끌고 빈을 포위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는데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이 전쟁은 1529년에 발발한 제1차 빈 공방전이 154년 만에 재개된 것이었다. 제1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는 헝가리를 차지한 이후 신성로마제국까지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보급품 부족과 겨울의 추위로 점령에 실패했다. 제2차 빈 공방전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과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지원에 나서 오스트리아까지 연합군은 총 9만 명으로 오스만 군보다 열세였지만 연합군의 기병들이 1만8000명에 달했으며, 폴란드의 기병대인 윙드 후사르가 포위전의 마지막 이틀간인 9월 11~12일 벌어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결국 오스만 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초기 지어진 궁전은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제2차 빈 공방전으로 인해 모두 파괴된다.


1742년 마틴 반 메이 텐스가 그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 사진=슬로베니아 국립 미술관 소장


1696년 재건 추진됐으나 1701년 스페인 계승 전쟁으로 공사 중단


1696년 레오폴트 1세(1658~1705)가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에게 황제의 후계자인 요제프 대공에게 줄 왕실을 건립하라고 명하자 쇤브룬의 재건이 추진됐다. 1700년 궁전의 중앙부분이 완공됐으나 1701년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4,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와 프랑스·스페인 간의 전쟁)이 발발하고 1711년 황제 요제프 1세(1678~1711)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겹치며 공사 중단과 설계 변경이 반복됐다.


완성되지 않은 궁전은 황비 아말리아 빌헬미네의 거처가 되었다가, 1740년 카를 2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합스부르크가의 왕위를 계승하고 쇤브룬 궁전을 왕실로 선택함으로써 공사가 재개된다.


           

1775년 세워진 글로리에테(Gloriette)는 ‘작은 영광’이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의 결과로 얻은 평화를 기념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사진=픽사베이.


글로리에테와 세계 최초의 동물원


1780년대 완공된 쇤브룬 궁전의 면적은 186만㎡(56만2650평)이다. 외관은 바로크 양식,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1441개의 방이 있다. 궁전의 상징이기도 한 노란색 외관은 잇따른 전쟁 후 국고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용을 절감하고자 진흙에서 추출한 도료로 칠해졌다. 궁전의 맞은편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글로리에테(Gloriette)는 ‘작은 영광’이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전쟁(1756~1763)의 결과로 얻은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1775년에 세워졌다. 이외에도 약 1.7㎢에 달하는 바로크 양식의 왕궁정원, 186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오랑제리(Orangery·열대식물이 겨울을 나도록 설치한 온실), 세계 최초의 동물원, 그레이트 팜 하우스, 궁정마차 박물관, 넵튠 분수, 로마 유적 등이 있다.


쇤브룬 궁전 전경. 사진=쇤브룬 궁전 홈페이지


제1차 세계대전 선전포고 서명한 프란츠 요제프 이곳에서 영면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궁전은 빈자리로 남았고 프란츠 2세(1768~1835)의 통치 기간에는 여름에 머무는 거주지로 사용된다. 그 후 나폴레옹이 1805년과 1809년에 빈을 점령해 쇤브룬을 사령부로 사용했으며 거대한 브뤼셀 태피스트리(실로 그림을 짜 넣은 벽걸이 융단)로 장식된 나폴레옹의 방은 지금도 남아 있다. 1806년 8월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 의해 물러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설립됐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해 7월 28일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카이저빌라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에 서명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됐다. 프란츠 요제프는 이틀 후 카이저빌라를 떠나 쇤브룬 궁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16년 11월 21일 영면했다. 2년 뒤인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카를 1세(1887~1922)는 이곳에서 퇴임 연설을 거행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랜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그 후 쇤브룬 궁전은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소유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는 1955년까지 쇤브룬 궁전은 영국 대표단과 오스트리아 연합위원회, 영국군 주둔지 본부 사무실로 쓰였다가 1955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재건되면서 이 궁전은 박물관이 됐다.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이 이곳에서 회의를 열기도 했다.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리아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긴 건축물로서 매년 300만 명이 이곳을 방문한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2월 3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203/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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