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연필깎이

by 이상희

2015년 MBA석사과정때 동아리에서 원우들과 인왕산 둘레길 걷기를 하면서 서울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70년대와 80년대 생활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1981년생으로 80년대 후반의 기억이 어렴품이 기억난다.

80년대 생활상을 보니 모형 커텐옆의 연필깎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다녀온지는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감동받았던 추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연필깎이 사진을 아직도 스마트폰 갤러리에서 찾아보곤 한다.

이날이후 나는 집에 있는 80년대 필름사진을 모아놓은 앨범도 자주보곤 한다.

사진을 볼때면 나는 어린시절 아빠에 대한 추억이 생각난다.

어린시절 아빠는 나를 엄청 예뻐하셨고 나에게 인자하셨다.

80년대 당시 아빠의 직업과 직급은 지방직 공무원 주사였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공무원이 철밥통이니 좋은직업이니 하지만 당시의 시골의 공무원은 우리나라 자체가 가난하다보니 박봉등으로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하였다.

하지만 아빠는 시골 공무원의 박봉속에서도 나를 공주처럼 키우셨다.

당시의 내가 사는 군지역은 공단도 없었고 산과 들뿐인 소위말하는 허허벌판이었고 농촌의 젊은부부들이 소득이 거의없는 상황에서 아이들도 많이 낳았다. 그러다보니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내가 사는 지역은 사교육은커녕 아이들을 제대로 케어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아이들은 언니 오빠가 물려준 옷을 입고 대충 자른 머리스타일을 하기도 하였고 더 심한 경우는 머리에 이도 있었다. 놀이는 공개, 고무줄, 흙장난을 하고 노는 시골이었다. 하지만 딸은 곱게 키우고 싶어하는 아빠의 영향으로 사투리를 구사하는 나의 말투를 듣기 전까지 모르는 사람들은 도시의 부잣집 아기들과 구분이 안될정도라고 할정도로 친구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하며 자랐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나에게 추억을 심어줄려고 여름철엔 풀장에도 데려가셨고 관광지도 많이 다녔다.

항상 파마머리를 하거나 한복을 입을땐 비너도 착용을 하고 평상시엔 드레스도 입으면서 집안에서 공주인형도 가지고 놀고 생일이면 꽃장식이 가득한 큰 버터케익을 사주시고 생일파티도 근사하게 하였다. 친구들이 부러워할정도로 나의 어린시절은 공주같았다. 그만큼 손에 흙뭍이길 싫어할정도로 공주같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당시에 초등학교 저학년은 연필을 사용하고 고학년부터 샤프를 사용하였다. 당시 문구점에 파는 디자인이 이쁜 연필깎이가 가격이 다른 문구에 비해 좀 비싼편이였으므로 시골에서는 가지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고 대부분 연필깍는 칼을 사용하였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손으로 작업하는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라고 할 정도로 모든게 다 서툴렀다. 하지만 부모님은 다른 것은 나에게 없는 돈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에 비해 연필깎이는 이불러 사주질 않았다. 직접 손으로 깎아 사용해보기도 하고 남들하는건 해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야 손도 빨라지고 앞으로 살면서 무슨일이던 직접 부딛힐수도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어린시절 손으로 하는 것이 안그래도 남들보다 서툰데 연필을 깎다가 심이 손에 뭍고 더러워지니 어린마음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였다.

1988년 초등학교 1학년때 하반기의 일이었다. 그 시점 나는 코피를 자주 쏟았고 양호실에 자주 누워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코피를 쏟아 담임 선생님께서 아빠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전화걸어 아빠를 부르셨다.

놀래셔셔 조퇴하고 달려오신 아빠가 그날 짜장면도 사주시고 뭐가 갖고 싶냐고 물으셨다. 나는 평소 갖고 싶은 이쁜그림이 그려져 있는 큰 연필깎이를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아빠는 바로 그것을 사주셨고 나는 그 연필깎이를 6학년 졸업할때까지 고장없이 잘 사용하였다. 30년도 더 지난 아직까지 코피로 인해 선물받은 연필깎이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심한코피로 인해 어린나이에 무섭기도 했지만 그 코피로 인해 아빠와 맛난 짜장면도 먹었고 갖고 싶었던 연필깎이를 선물도 받았던 기억과 아빠의 따스한 정이 서울역사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떠올랐다. 그땐 아빠한테 받는데 당연하다고 여겼고 아빠의 월급이 적은지도 몰랐으며 그 돈을 아껴 나를 공주처럼 키울려고 한것도 몰랐었다. 당연하다 여겼던 것이 내가 사회생활을 해보니 아빠한테 죄송했다. 철없던 난 돈벌기가 힘든건지도 몰랐고 감사한것도 몰랐다. 또 내돈을 내고 공부를 하는게 아니다 보니 공부도 절실한지 몰랐고 사춘기시절에는 학업에 흥미를 잃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적도 있었다.

온실속의 화초마냥 곱게만 자라왔던 내가 사회초년생때 적성에 맞지 않은 업무로 고생을 하고 감정노동을 할땐 남몰래 첨에는 많이 울었다. 내가 공부할 시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이러나 싶은 마음도 들어 내 자신이 미웠던 시기도 있었다.

날 이뻐하시던 아빠도 사회생활면에서는 엄격하고 혹독하게 나를 꾸중하셨다. 앞으로 살아갈일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서 사랑받던대로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수 없다고 하셨다. 처음엔 나를 이렇게 꾸짖어실때마다 원망을 하기도 하였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사회생활속에서 돈버는게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평생을 한직장에서 하고 싶었던 것을 참고 정년까지 버티시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신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린시절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아빠의 고생이라 생각하니 이제 70을 넘기신 아빠의 모습이 한없이 작고 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때 나이 많으신 상사들을 보면 아빠를 생각하면서 그분들을 이해하기도 하였다.

가정을 이루고 처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아빠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박물관의 연필깍기를 보니 옛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울아빠세대 한국경제 성장의 주역인 그 세대의 아버지들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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