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보니
같은 자리지만 난 아주 먼길을 떠난듯했어.
만날 순 없었지 한번 어긋난 후
너의 자리에서만 살아있는 먼 그대
어디선가 노랫 소리가 흐른다.
채연은 지하철에 앉아 똥이 마려운걸 참고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에 원망만하고, 졸렬한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비웃고, 괜히 아무 이유없이 미워하고, 아무렇게나 되란듯 취급하는 참을 수없는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고, 뚝 내던지고 가는 왕싸가지에 밥맛 없어했던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이다지도 연애든 일이든 엉터리로 할 수 있을까 새삼 채연은 스스로를 한없이 우주 속의 먼지보다도 작은 아니, 길거리에 채이는 플라스틱 텀블러 딱 그만큼의 사이즈로 스스로를 느꼈다.
왜 나는 살아가고 있는 걸까?
왜 나는 너 없이는 살지 못하는걸까?
왜 너는 나를 옭아 매는걸까?
왜 우리는 서로 이다지도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걸까?
너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아니면 우주의 섭리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채연은 감사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본인의 모습이 참 예뻐서. 참 신기한 일이다. 분명 어제 상혁 때문에 열받아서 아이스크림을 3개쯤 먹고, 라면도 먹고, 된장 차돌베기에 팝콘 한 바께스를 먹고 , 수박 한덩이, 콜라, 맥주, 와인, 햄버거, 돈까스까지 먹고 느끼해진 몸으로 잤는데도 왜 여전히 얼굴은 홀쭉하고 배도 안나온걸까??
어쩌면 말이다, 채연이 예쁘기 때문에 상혁에게 얽혀 질기디질긴 일을 꾸준히 지겹게 출근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 또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는 길이리라.
왜 영업을 하러 멀리 여기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해 채연은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
여기 이 곳엔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도 없다. 모두가 각 자의 스폐셜러티를 가지고 있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명 채연 뿐이다.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를.
"하는 일이 뭐에요?"
스튜디오에 한 포토그래퍼가 물었다.
"저 하는 일 진~짜 많아요. 몰라서 그렇지!!예를 들면 여기서 이렇게 포터그래퍼님이랑 같이 말상대 해주는거?"
사진사는 그것도 일이냐는 식으로, 아니 지랄하니???라는 소리없는 외침으로 기분이 나빠졌는지 냉큼 자리를 떴다.
소품 담당자와 미술팀장은 아예 대놓고 채연을 구박했다.
"여기 무슨 일 때문에 오신거죠??"
"거기서 얼쩡대지 말고 저리좀 비켜주세요."
그러면 채연은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떨구며 좁은 공간 안에서 갈데없이 도망치기 바빴다.하지만 이 모든 건 전부가 일의 한 부분이었다고 채연은 알고있다.벼랑 끝에 선 채로 고생하는 사람들 곁을 지켜주는 일.
대게는 일이란 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그 곳에서 버티기 위해선 완충 작용을 맡아줄 사람이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이 끝나면 카타르시스도 느끼게 되고 기타등등 보상이 따라오는 법이니까.
그런 채연이 드디어 클라이어트를 만나러간다. 구박만 받았는데!!!! 온갖 놀림과 조롱과 면박을 당하고서 그 책임은 육백만원짜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프로젝트를 맡아 연출하게 된 것이다. 해야될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건, 바로 고객접대다. 뭘 어떻게 해야할까?
같이 술을 한잔 마셔야하나?
맛있는 밥을 한번 사고 커피까지 대접하면 될까?
그러다 채연은 다 관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만나러 가기로했다.
그저, 고마운 마음 하나 가지고서.
바로 그때 채연의 눈에 띈건 하얀색 플로렌스 라이트를 알알이 박아 창을 만든 스튜디오 조명이다. 그 불빛이 너무 부드러워 '아~~조으네~'란 생각을 하는 차에 포토그래퍼가 채연에게 소리쳤다.
"거기~~그린 시트 좀 붙여줘!"
찰칵찰칵 소리와 함께 방안을 가득 채운 초록색 때문에 모든 구박은 한꺼번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단가로 치면 500원하는 투명 비닐 한장이 만들어 낸 섬뜩하리만치 웅장한 기운에 채연은 단박에 매료되었다.
'말이 안되는데...사실이다. 5백원의 실체가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