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솔길 May 14. 2016

먹는 여자

공동 경제와 와인

아람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널린 빨래를 걷어 개기 시작했다. 보통은 청소기를 돌리던가 부엌에 들어 가 설거지를 일단 해치우는 것이 습관이지만 일이 너무 하기 싫을 때는 순서를 거꾸로 해보면 또 할만하기 때문이었다. 혹은 전혀 안 해봤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도 답답함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티백을 우려 진한 찻물을 낸다음 갱지를 구겨 손 때가 묻은 유리문을 닦는 식의 아주 작은 시도들 말이다. 그러다 아람은 어지럽혀진 거실보다 자신의 머릿속이 더 복잡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냥 도망가기로 했다. 옆 동 혜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바쁘시죠? 오늘 금요일인데 어디 안 가세요?"

"그렇구나, 벌써 금요일이네요, 날씨가 너무 좋긴 하네요".

아람은 다시 낚시질을 했다.

"집에 쓰던 장난감인데 오래돼서 좀 낡긴 했지만 애들이 일주일은 반짝 좋아할 거예요. 가져가세요."

"그럴까요? 고마워요!"

"근데 백화점 안 가실래요? 화장품 살 일이 있어서 갈까 하는데요."

"좋죠, 저도 신발 사고 싶었는데 가요 가"

아람은 자신도 옆 동 여자에게서 받아왔던 드럼 세트를 혜란 엄마에게 들려주고는 애를 매단 혜란 엄마와 셋이 줄래 줄래 백화점으로 향했다. 얼마만에 받아 보는 조명 빛인지 아람은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두 딸에게 치여 이미 하녀로 전략된 이래로 우울감은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이렇게라도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애 엄마 둘이서 화장품 코너에 앉아 샘플을 이리저리 발라보며 헤헤거리고 나니 약간은 창피한 생각도 들긴 했지만 오랜만에 테이블용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니 같은 얼굴인데도 어찌나달라 보이던지 신이났다. 그리고 둘은 푸드코트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 부산 어묵이 맛있다느니 프랑스 파이 키쉬가 먹고샆다느니 한창 수다를 떨다가 반숙 카스텔라 집에 동시에 멈춰섰다.

"이건 모지?"

옆집 여자 혜란 엄마가 무의식 중에 신기한듯 쇼윈도를 들여다 보면 말했다.

"여기요, 이거 하나 주세요".

아람은 세라믹 도자기에 구워진 카스테라를 냉큼 샀다. 물이 끊고 나서 딱 7분 만에 꺼내야만 반숙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람은 반숙을 카스테라로 싸고 도자기에 담고 그걸 가마로 구어 만들다니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충동구매를 한 것이었다.

"어머! 맛있겠다! 나도 맛 좀 봐요"

아람은  집에 가져 가서 혼자 먹을 생각이었는데 혜란 엄마가 잽싸게 빵 봉투를 낚아채더니 반을 뚝 뜯어 덥석 먹었다. 혜란 엄마는 아람과 코드가 잘 맞다가도 먹을 것 앞에선 한 없이 동물적이 되는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덩치가 커다란 그녀는 절대로 음식을 패스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먹는 혜란 엄마 때문에 아람은 밀려오는 스트레스를 느꼈다.

'아 이거 어떡하지?' 그렇다고 치사하게 먹는 것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드럼 세트에 마이크는 다시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원래 제 영어 교재 부속품이거든요."

아람은 밀리지 않으려고 집을 나서기 전 줬던 장난감을 들먹였다.

"마이크요? 가져가세요. 전 다이소에서 하나 사죠 뭐, 어차피 소독제도 사야 하니까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아람은 왠지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 같아 괜히 불쾌해졌다. 아무리 중고 장난감이라지만 공짜로 주는 건데 쇼핑이며 빵까지 오늘 하루 왠지 혜란의 코만 풀어 준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 아람은 들었다.

집에 돌아와 파곤에 지쳐 아람은 와인을 한 잔 가득 따라 마셨다. 케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도둑들>이 이제 막 재방을 하고 있었다. 마카오 박 vs. 뽀빠이의 빅 매치, 펩시 vs. 애니콜의 신경전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였다. 80만 원을 가지고 홍콩에 가서 하루아침에 88억을 벌었다는 전설의 대도 마카오 박의 벽을 뛰어넘으려고 뽀빠이는 그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꾸민다. 애니콜은 자신과의 싸움을 한다는 펩시에게 세상에 싸울 게 얼마나 많은데 자기랑도 싸우냐며 엄청난 쌍년이라고 한다. 영화의 결말은 마카오 박이 결국 다이아몬드를 챙기고 펩시는 금괴를 받고 뽀빠이는 이번에도 개털이 되고 애니콜은 호텔 수영장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신나게 즐긴다는 것이다. 똑 같이 도둑질을 했는데 누구는 지갑이 두둑해지고 누구는 여전히 개털이라는 생각이 아람은 들었다. 이런 계산은 정말 피곤하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양적 승부를 할 것인가 질적 평가를 따져 봐야 할 것 인가? 아람은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유치하게 나이를 들먹이고 남편이 하는 일이며 돈 씀씀이에 대해 끄집어 냈던 혜란 엄마와의 대화가 후회스러웠다. 역시 좁은 이 땅에서 공동 경제 활동이라니 아람에겐 힘에 부쳤다.

하지만 까짓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런 것은 없었다. 받은 장난감을 준것이니 공동 경제의 실현이고 죽이 맞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눴으니 은근한 사회 생활을 한 것이다. 아람은 달콤 씁쓰름한 와인을 비우며 마저 입가심을 했다.   





작가의 이전글 먹는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