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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23. 2016

먹는 여자

염색과 비빔냉면

아람은 5월에 들어서부터 쭉 헤어숍에 갈까 말까 고민을 했다. 지독히 까만 곱슬머리를 스트레이트 펌으로 쭉쭉 펴고도 싶었고 탈색을 해서 노랗게 물을 들이고도 싶었다. 아예 삭발을 해버릴까 싶었다. 어쨌든 이른 여름 날씨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이도 저도 아니면 두피 마사지라도 받을 참이었다. 지금껏은 민트 샴푸로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콜드 모드로 놓고 훌훌 말리거나 가끔은 고데기로 머리카락 뿌리 부분을 지져 왔었다. 그러다 일주일 전부터 우희와 우정이 40도를 넘나드는 열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아람은 쪽잠을 자면서 간호를 한답시고 갖은 수발을 들어야 했다. 우희는 아주 작은 부분에도 예민하게 굴었고 우정은 손을 탔는지 자꾸만 앉아 달라고 울었던 것이다. 둘 다 증상이 완화될 때쯤 감기 기운이 옮았는지 막일에 지쳐 나가떨어진 건지 아람의 머리가 뜨겁고 무거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이 생겨서 좋은 점은 외로울 틈이 없다는 것이고 그 대신 잠시도 쉴 틈리 없어져서 어쩔 땐 투명 인간이 되고 싶어 진다. 아람은 도망치듯 집을 나와 미용실을 찾았다.

"너무 시커먼 거 같아서요 좀 밝은 색으로 빼주세요."

"한 번도 염색한 적 없는 버진이에요? 그럼 염색 만으로도 될 텐데요"

"아니요! 탈색하려고요! 아주아주 밝게 빼고 싶어요. 지금은 무지 우중충해요."

"탈색은 비싸요. 이 정도면 베이식 톤이 나올 텐데요."
"아니에요! 한 번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싶지 않아요. 이거요! 애쉬 블루로 할래요."

돈을 더 벌 수 있으니 좋을 텐데도 미용실의 원장은 한사코 갈색 염색을 권했고 아람은 머리털이 상해도 전혀 상관없으니 탈색을 해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아람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어기 장을 놓고 나서도 다른 손님이 끝날 때까지 둘은 무언의 씨름을 계속해야 했다.

"상담은 조금 있다가 다시 하도록 하죠."

그러고 보면 아무리 작은 가겟집이라고 하더라도 돈이면 다가 아닌 곳이 많았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장사치나 얼뜨기 속물은 결코 모르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아람은 생각했다. 아람은 힘들고 지칠 때나 앞이 막막할 때에도 바로 골목 한 모퉁이만 돌아 꺾으면 얼마든지 숨을 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곳곳에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두 시간을 기다리며 헤어숍 원장의 기에 눌리지 않고 맞짱을 떴지만 막상 시술은 한 시간 안에 끝나버렸다. 허무하기도 하고 왠지 머리가 못마땅했지만 아람은 고집을 부려선지 허기가 물밀듯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뭐라도 먹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들어가면 우희와 우정이 조금이라도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아람으로선 저지할 힘이 필요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더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만둣집 식당으로 들어갔다. 왠지 매운 음식이 당겼는데 마침 간판 메뉴에 비빔냉면이 있었던 것이다. 좁은 가게 안은 테이블이 꽉 차서 자리가 없었다.

"여기 앉아도 돼요?"

아람이 묻자 허름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짐을 치우며 아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기 앉으세요."

아람은 또다시 팽팽한 기를 느꼈다. 누가 기선을 제압하고 누가 순순히 말을 듣느냐를 가지고 나이 든 사람들은 예민하게 구는 것이다. 까짓 거 앉든지 말든지 내 먹을 것만 생각하면 될 것이지 아람은 그걸 좀 물었다고 어른인 채하려는 늙은 여자가 고까웠지만 그냥 참았다. 밥을 먹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람은 주위를 휘 한 번 둘러본 뒤 앞자리에 앉아 뜨거운 밀가루 수제비를 먹고 있는 할머니를 관찰했다. 그녀는 이 더위에 추운지 긴 팔에 스웨터까지 입고 있었다. 반팔과 치마 차림의 아람은 할머니와 몸이 바귄다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다가가기 싫어하는 늙고 못생기고 성질머리 고약한 노처녀가 된다면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울까 싶었다. 아람이 뚫어지게 할머니를 노려보자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뜨며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 대뜸 구원을 요청했다.

"여기 앉으세요."

새로 들어온 깡 마른 여자는 눈썹 문신을 해서 더욱 고약한 인상이었다. 아람은 이번에도 상상을 했다. 마른 몸매에 아이라인을 하고 다니면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환자 취급을 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새 아람은 식초와 겨자를 친 비빔냉면을 세 젓가락으로 끊어 먹고 나서 왕만두 세 개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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